“세실”에 있어서는 피난처가 그의 부친이며 부친과 더불어 부자연스럽게 유희(遊戱)같은 개고기생활을 이어나가기를 원한다. “ 도미니끄” 에 있어서는 지치고 슬픈 사나이인 “뷔끄”이다. 두 소녀 가운데 아무도 참되게 살고 책임을 지려고 시도(試圖)할만한 힘을 갖고 있지 않다. “세실”과 “도미니끄”는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은 가정의 주위 환경 때문에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이 부상에 대하여 그녀들도 역시 공범자(共犯者)인 것이다. 왜냐하면 작난감을 빼앗기고 뽀루퉁해진 소녀의 역할을 연기(演技)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슬픈 연기를 한다. 그 슬픔은 그녀들에게 돌아와서 그녀들은 침범해버렸다.
이 소녀들은 삶에 대하여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녀들은 고치(繭) 속에 피난하여 외부에서 무엇이 일어나는가 알아보려고 원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정해진 유일한 구제인 병(甁) 하나와 잔(盞) 둘…』에 의해서 내부의 공허를 견실(堅實)하게 해야한다. 그녀들에게 있어서 행보이란 권태스럽지 않다는 이외의 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얼마나 보잘것 없고 가엾은 행복인가!
앞서 우리는 <프랑스와즈 싸강>의 작품에서 그 전형적인 구절 셋을 골라 간단한 분석을 했다. 즉 『나는 반성한다는 습성이 없었어요…… 나는 사고(思考)라곤 하지 않으니깐요……』 『도대체 내 생활을 구성하고 있었던 이 공허(空虛)란…』 『나는 희생이라고는 한 적이 없고 희망마저 없었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의 생각들은 결국 『이곳이 보통이라고 생각한 나의 정열적 생활……』로 요약되리라. 이 넷째번의 구절은 <까뮤>가 말한 『인생을 무의미하게 살아온 것보다는 오히려 고뇌(苦惱)의 인생이 더 가치로웠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의 반영(反映)인 것이다. “뤼끄”나 “도미니끄”나 “세실”들은 권태 속에 고민을 억지로 몰아넣는 인간들이며 고민을 그들의 생활에 고의적으로 현양(顯揚)하는 일종의 생활태도라 하겠다.
이 두 작품의 사상이 무엇이냐? 이 작품의 인기(人氣)는 출판업자들의 교묘한 기술의 소치냐? 이 작품을 통해서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동물적인 것을 자극하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것인가? 혹은 작품에 등장되는 인물들과 비슷한 작가의 연령을 논의해야 할 것인가? 의심없이 다 일리가 있고 또 다분히 이러한 점을 강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싸강>이 묘사한 소녀들은 번데기처럼 제각기 탈을 쓰고 있어 아직 탈피하지 못한 말하자면 미완성 상태에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소녀들의 이야기다. 이 소녀들의 생태는 문자 그대로 양식을 갖춘 완성된 부인이라고 자타가 공인할만한 현대적 여성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다 원하고 있는 것이다. 완성되지 못한 완성 단계에 있는 소녀들로서는 있을 수 있는 일들의 이야기라 하겠다.
<싸강>의 작품들은 소년 소녀들의 다수가 은밀히 간직하고 있는 향수를 묘사한 것이다. 그들은 실존의 허다한 문제에 직면하였을 때 꾸태여 절망해 보고싶어하고 가장된 생활의 언덕으로 미끄려저가고 그들의 젊은 양 어깨로서는 때로는 너무나 과중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할 때 이러한 모든 경우를 당하면 그들은 감각적인 이야기 다시 말하면 연애유희를 꿈꾸는 것이다.
“도미니끄”나 “세실”같이 진실로 생활을 각성하여 껍질을 박차고 탈피하려는 소녀들에게는 그림자에 사는 것보다 남의 부모라도 찾아갔었어야 했을 것이다. “세실”의 아버지처럼 바람잡이의 성격을 고스란히 딸에게 전해준 아버지. 아침마다 『신경 쇠약의 발작을 하는』 “도미니끄”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이 여자 대학생들에게는 다른 가정을 동경하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진실로 부모노릇을 하는 말하자면 자식교육을 해주는 다른 가정을 찾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종류의 소녀들로서는 연애유희에 골몰함즉도하고 사람을 손상할 수도 있는 작난감으로 놀아보자고 함즉도 하지마는 또한 편인도적이며 종교적인 학생클럽과 교제해보고 싶을 수도 있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학생 클럽이 실재에 있는 것이다.
이 두 작품의 내용이 파리를 무대로 이루어졌으니까 필자는 여기 파리대학생들의 큰 클럽 하나를 들어보겠다. 매년 1만5천명 이상의 파리대학생들은 파리대성당에서 85킬로 상거의 「샤르트르」대성당까지 도보로 순례하며 그들의 생활을 자각하고 그들의 책임을 스스로 지는데 도우심을 구하여 성모 찬양의 기도를 울리는 것이다. 이 진실한 대학생들과의 교제야말로 “세실”이나 “도미니끄”에게 『슬픔』이 아니고 『어떤 미소』가 아닌 그들이 찾는 즐거움을 천주님만이 줄 수 있는 참된 즐거움을 그들에게 주엇을 것이다. 그러나 <싸강>의 작품 어느 한 곳에도 「천주」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완전한 무도덕적인 것이며 때로는 부도덕으로 이끄는 것이다. “베르뜨랑”과 “세실” 또는 “도미니끄”를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대학생들이 있는 한편, 그릇된 길을 걷고 있는 남녀 학우들이 정도(正道)에 나오게 하기 위하여 감히 단식(斷食)을 하며 「몽아르뜨르」성당에서 성체조배로 밤을 새우기를 사양치 않는 다른 대학생들이 있다는 것을 필자 자신이 파리에 있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우리 바로 옆에서는 한국학생들이 고상한 문제를 위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투쟁하여 생명을 잃고 있지 않는가. 그들은 『이것이 보통이라』고 생각했기에 생활이 결코 「고민」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대학생들은 희생할 무엇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생활은 희망 즉 자유를 위하여 있었다. 이것과 <프랑스와즈 싸강>이 그 작품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것과는 얼마나 대조적이냐. “세실”과 “도미니끄”는 결국 「라틴」가(街)에서 소로본느의 복도에서 허다한 다방에서 우울하고 상처를 입고 무기력한 남학생들만 본 것이며 기성인물들이 좋아 보이나 피로해 있는 것만 보고 모든 애인들이, 그러나 맹목적인 면만 보고 지난 것 같다. 그러나 다행히 세상은 인간의 가짜품만으로 이루어져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와즈 싸강>의 작품을 읽은 젊은 남녀학생들은 향락과 환희의 차이가 얼마나 멀다는 것을 잘 안다. <베르그송>은 말하기를 향락은 소극적이며 남에게 전해줄 수 없고 쉽게 고갈되나 그와 반대로 환희는 적극적이며 전해줄 수 있는 것으로 말하자면 어떤 노력의 열매요 항상 새로워질 수 있어 고갈될 줄 모르는 것이 환희며 저진하는 자의 보상이라고 했다. <싸강>의 주인공들은 향락밖엔 몰랐고 그나마 초라한 향락이 있다. “세실”이나 “도미니끄” 비슷한 남녀 학생들이 실제로 있다. 그들도 우리의 형제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죽었고 그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줄 희망은 언제나 있는 것이다.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인하여 발한 희망을 빛내기 위하여 또 사워보기도 전에 전의(戰意)를 잃은 이 젊은이들에게 환희를 주기 위하여 우리들은 과연 무엇을 했느냐? 우리들이 대하는 「세실족」 또는 「도미니끄족」들을 죄로 몰지말라. 청춘기를 권태스럽게 지나는 그들을 위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을 때 우리도 또한 그들과 같은 「생명없는 인생」이니까.
필자는 <프랑스와즈 싸강>처럼 오늘날의 젊은 사람들을 보는 것을 반대하는 바이다. <싸강> 은 자기 사생활을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슬픔과 권태와 그릇된 미소와 혐오외에 다른 것을 노출했다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증명했다. 차제에 <싸강>은 그 다른 것을 우리에게 시도했다.
황교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