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河陽(하양)본당
『전교는 접촉』이라는 방침아래
대중과 호흡을 같이하는 사제
무학산 기슭의 뾰죽집 하양성당
발행일1960-05-22 [제230호, 4면]
무학산 줄기가 뻗어내리 계곡을 이룬 어귀 서동(西洞)에 훤칠하게 세워진 하양(河陽)본당은 농촌의 정적 속에서 30년의 역사를 엮고 있다.
대구에서 동편으로 23키로 지점에 있는 하양본당은 경산(慶山)군애서는 가장 오래인 본당인데 지금은 행정 및 교통 등 여러사정에서 영천읍으로 이전된 그 옛날의 경북 화산본당의 공소이던 것이 1931년에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그후 20년이 지난 1952년에는 경산본당을 분리신설케 하는 등 괄목할 발전상을 보여주었으며 본당 아래 1천2백명 관내의 5개면에 걸쳐 금호 와촌 평사 신광 구룡 청천 등 6개 공소를 합하면 2천명을 넘는 교세로서 대구교구내 군부의 유수한 본당이다.
초대부임 프랑스인 <하몽>(河) 신부로부터 제7대 주임인 <펠릭스> 이(李林春) 신부는 1955년 5월에 부임하여 만5년간을 묵묵히 포교에 전념하는 한편 이 본당의 기틀을 확립한 노력가이다. 성당의 증축을 비롯하여 유치원 병원 수녀원 등 즐비한 붉은 벽돌의 우람한 건물들이 이 신부의 그동안의 줄기찬 노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동안의 발전은 참으로 놀랄만 합니다.』했더니 본래 수식(修飾)이 없는 <펠릭스> 신부는 『뭐 발전이란게 있읍니까. 필요한 것이 있으니 그럭저럭 되있을 뿐이죠』한다. 참으로 필요긴절한 일들이 끈기있는 노력의 결정으로 이룩된 것이다.
그는 30대의 소장사제로서 젊은이에게는 젊은이답게 부로(父老)에게는 노장답게 모든 계층을 가장 자연스럽게 접촉하는 원숙한 면모를 갖추고 있다.
『전교는 접촉』에서라는 가장 당연하면서도 성실한 방침을 견지하면서 모든이를 이끄는 한편 모든이 가운데 뛰어든다. 그것을 위해서 기회가 닫는대로 자주 또 많이 접촉의 기회를 갖기에 주의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임종대세(代洗)를 되도록 친히 실시하여 구령(救靈)으로 이끌리는 망자에게는 물론 그 가족에게 사제로서의 정열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로말미암은 결실은 추측되고 남음이 있다. 그는 다시 『만일 성공한 것이 있다면 교회를 사회에 알린 것이다』라고 말한다. 성당은 가톨릭신자만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을 시정했다. 교우 아닌 사람도 갈 수 있는 곳으로 이해시킨 것은 그가 항상 염두에 교우 아닌 미신자를 대상으로 사색하고 활동한 것이다. 이와같은 본당신부의 포교양식이 일부의 오해를 일으킨 것 같기도 하지만 「겟토」(특수사회) 의식을 분쇄하고 가톨릭의 문호를 확짝 열어준 것이 된 것이다.
이 신부는 당면과제로서 금호(琴湖) 공소를 본당으로 승격시켜 하루 바삐 사제가 주재할 수 있는 환경조성에 주력하는 한편 대중 속에서 대중과 함께 호흡하면서 극히 평민적인 태도에서 대중과 친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