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의
발행일1960-05-29 [제231호, 3면]
일상생활에의 적용
인간의 모든 행동은 어떤 것이건 가치(價値)의 경중(輕重)에 관계된다. 그리고 그 가치경중은 세계관(世界觀) 인생관(人生觀) 및 그 사람이 무엇이냐 하는데 달려 있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시종일관(始終一貫)하고 논리적인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무의미(無意味)한 행동을 취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그리스도인적 세계관에 이르는 기술적인 일이고 인간관계(人間關係)서 비롯한 것일지라도 무의미한 행위는 할 수 없다.
달리 표현하면 인간의 모든 움직임은 자유선택인 것이며 도덕적 행동이니만치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은 그리스도인의 윤리로서 제율(制律)되어야 한다. 그런 윤리는 개인적인 것이면서 사회적인 것 즉 순수한 개인행동이 아니고 사회 혹은 단체 안세어싀 인간사이에서 된 행위는 모두 사회적인 것이다. 비윤리(非倫理)적인 짓이라고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은 반(反) 그리스도적일뿐 아니라 동시에 비인간적인 것이 된다.
실지로 그리스도인 생활 속에 들어가는 교회의 사회교의는 적극적인 태도와 소극적인 태도로 표시될 수 있다. 소극적인 태도로서는 가령 무신적 공산주의와 접촉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식으로 교회가 금지한 것과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적극적인 태도는 교회의 사회교의가 가르치는대로 그것을 바탕으로 창조적이요 효과적인 행동을 일으키는 일이다. 그 어느 경우이건 그리스도인은 혼자서 무슨 일을 할 수 없다.
교회의 사회교의는 그리스도인들이 협동하도록 권하고 있으며 그 행동의 효과를 반드시 거두기 위해 그들과 선의(善意)의 미신자들간에 서로 힘을 합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자기들의 선택한 일에 가톨릭사회원리를 곧 연역(演繹)해 쓸 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연역한다는 관념은 나의 생각으론 매우 위험한줄 안다. 순수한 연역은 원리에선 윤리신학(倫理神學)에 일치해야한다. 이것은 적용될 윤리에는 부적합하다고 본다. 순수하게만 그리고 단순히 연역한 것만으로서는 흐르는 현실에 위험을 겪을 것이요 현실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며 오직 훌륭한 이론으로만 끝막을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태도로서 참으로 심사묵고(深思默考)한다면 귀납(歸納)과 연역의 서로 일치하는 결과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 귀납은 사실과 일반관념에서 온 것이다. 연역은 원리에서 온 것이며 이는 반드시 현실에 적용되어야만 한다.
달리 설명해서 그리스도인의 사회행동은 원리의 지식과 현실의 지식 거기서 오는 필요로 지탱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 사회질서는 한번만 던져지고 마는 것이거나 천상적인 것만은 아니다. 이는 부단히 역사의 각날(各日)에 세워지고 있는 것이다.
책임과 자유
금지에 관계된 모든 사항은 명백한 것들이다. 금지는 정(定)해진 것이며 행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으로 부득이한 경우 이외에는 피치못하는 일이다. 그로써 불편이 있고 손해를 보며 죽는 한이 있더라도 금지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서 긍정할 것은 긍정하고 부정할 것은 부정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나서야 더욱 쉽게 극복할 수 있다. 금지로써 행동이 자유가 제한당함은 사실이다. 허나 더 원대한데서 볼 때 보다 넓은 방도로 거기(자유)에 이르는바 되는 것이며 교회는 언제나 일반적인 견지 누구나 수직(守直)할 수 있는 금지를 가하고 있을 뿐이다.
실예를 드러 보겠다. 오늘 기업주들은 고용자를 위한 위생 도덕 사항에 어긋난 비인간적 처우를 할 수 없다. 만일 이런 가르침(금지)을 거스린다면 대죄를 범하게 된다. 기업주는 법적으로 단체협약으로 그리고 특별계약으로 마련된 정당한 임금을 지불해야 한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그는 정의(定義)를 어긴 죄를 범한다. 그리스도인 기업주는 교회의 사회교의가 제시하는 임금계약의 「발전적 변경」의 원칙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고용할 것인지? 어떻게 해가야 할는지? 이런 모든 문제는 많은 여지를 남기고 있다.
이런 복잡한 경우에 복종해야 하는 범위와 자유의 한계를 정한다는 것은 신중한 일이다.
인간과 조직의 관계
개인은 조직의 영향을 피할 수 없고 조직은 아무리 휼륭할지라도 개인 없이 있을 수 없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그리스도의 사회적으로 통치(統治)하심을 한 우리 안에서 높이고 동시에 그리스도인의 참된 인격력의 빛남과 그리스도인 정신에 의하여 활용되고 있는 조직의 빛으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해야 한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조직을 표방하면서 그 하는 짓이 순수한 견지에서 볼 때 그리스도인적이라고 판단할 수 없는 그런 조직 즉 제3의 위선단체의 영향을 경계해야 한다.
오직 원리(原理) 위에 운영되고 또 스스로 개선해갈 것을 가톨릭은 부단히 가르치고 있다.
공동선(共同善)을 안정(安定)시켜 가려는 국가의 목적과 거기 대한 교회와의 관련을 충분히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평신자들은 교회 안에서의 자기의 할 일을 자각하고 교회의 사회교의를 펴가는 누룩이 되어야 한다. 새 사회에 그리스도인의 가치와 원리를 불어넣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책임인 것이다.
행동으로 증거해야 그리스도교의 기반이 없는 각국선느 그냥 그리스도교적 사회교의를 멧세이지로 발행하는 것만으론 별로 성과를 얻지 못한다. 행동으로 거기 참획(參劃)할 수 있어야 한다. 행동이 동반치 않는 말마디만으로 무슨 힘을 보내기 어렵다.
희생적 행위는 깊이 남을 움직일 수 있다. 가톨릭학생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몸으로 사회 개선에(빈민구제에 나선다든가 하는 방법으로) 나설것이며 동료학생간에 배타적이요 편협되며 이기적 자기존대(自己尊大)로 대하지 말고 실로 누구라도 포용할 수 있고 인간의 자기발전에 큰 도량으로 대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정의와 사랑을 적용시켜 가고자 하는 가톨릭사회교의를 도처에서 수락하게 할 수 있어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