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르뜨르> <그라함 그린> 그리고 <로우렌스 올리버> 등의 작품 속에서 한 공통된 것으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그들은 고대(古代)의 이단(異端) 마니교(敎)를 일종의 현대적 경향으로 풍기고 있음을 본다.
제3세기 「바비로니아」인 「구느시스」교도 <마니>는 창조자는 선신(善神)에 반립(反立)하는 하나의 악마적인 것이라 했으며 「마니」교도는 세상을 악으로 보고 거기서 벗어나므로 구속된다고 하였다. 현대 「마니」교도들은 정신에 치중한 나머지 물질을 경천(輕賤)히 하고 땅위에 굳게 서지 않은 신앙을 마련하려 한다.
문학평론가이며 「죠지타운대학」영어교수인 예수회원 <윌리암 린치>는 미국서 가장 신랄(辛辣)한 가톨릭지성인의 한 사람으로 그의 근저 「그리스도와 아폴로」(쉬드그리고 와드 版)에서 위같은 평론을 했다. 「마니」교도는 도처에 있으며 특히 예술분야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에 반대하는 그의 입장은 - 무한(無限)에 파고들기 위해 바로 위로 올라가느니보다 참으로 오르는 길은 내려서는 길 즉 생명의 유한(有限)한 사실 위에 서는 것이다.
문학의 「이마쥬」 자유에 이르려하건데 반드시 사실 위에 내려서야만 한다. 그리스도는 그 좋은 본보기시었으니 “인간의 모든 현실 위에 내려왔다가 그의 아버지께 이르게” 되었다.
<린치>는 그리스도와 「아폴로」를 대조(對照)시키고 있다. 「아폴로」는 “일종의 주지설(主知說)로서 세계와 좁촉없이 그 자체 이외의 것과도 접촉이 없는 머리만의 사유(思惟)의 형태로” 대두(控頭)한 꿈을 상징하였다.
겨이 비겨 그리스도는 “온전한 한정(限定)이 있어 인성(人性)을 취한 사람으로(죄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인간과 같았으며 그는 그러한 무한, 꿈인 미(美)에로 그다지 쉽게 밀려들어가지 않았다”라고 하고 “나는 의 말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전생애와 존재에 완전히 흥미를 가지지 않는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폴로」의 편이 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바이다”
새 제3장(場)
「마니」교의 재생(再生)을 극장에서 볼 수 있다. 현대 비극은 “환경과 실존에서 오는 무가치 위협, 악, 배리(背理) 등 반신반의(半信半疑)의 것…… 우리 세대서 얼마든지 보고있는 터이다.
<슈르우드>의 「이디오트 딜라이트」, 의 「죠니 죤손」 그리고 <안델손>의 「키 라르고」와 「윈트셑」 등 <싸르뜨르>는 이론에서와 무대에 있어 그 배리의 원리에의 공식(公式)을 주었던 것이니 우리는 이상의 연극을 예거(例擧)할 수 있다.
현대비극은 또 다른 이단(異端)--구속은 자신의 선행만으로 얻는다고 한 「페라기우스」(註)의 생각에서 온 것이다. 현대 비극의 주인공은 제 운명을 넘어서 피를 흘릴지라도 굴복지 않는 것은 옛 비극의 주인공의 제운명에서만 마지막 지점을 두는 거와 같지 않다. 오늘의 “비극(演劇)에 있어서는 한정된 <이마쥬>를 버리려 한다. 그것은 신(新) 「페라구스」 수법(手法)에 의한 것이고 신(新) 제3의 타잎을 쓰기위한 것이다. 제3장(場)으로서의 박력 감탄을 사기 위해서이다.
註
페라기아니즘, 제4세기에서 제5세기 사이에 있었던 이단(異端). 패라기아니즘은 영국의 수사 <페라기우스>에 의해 주장된 것으로 인간이 구제되는데 오직 선행(善行)만으로 족한 것이라 했다. 페라기아니즘은 5교회 회의에서 정통 그리스도교인의 입장에서 선행은 중요하지만 신앙과 그로인한 구속에는 천주의 성총에 의할 것임을 밝혔다.
사회와 예전(禮典)
이와 한가지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사회의 유한정(有限定)한 것에 실증을 느끼고 절대를 피하려 한다. 이는 오류이다고 하면서 <린치>는 “그러나 가톨릭적 「이마쥬」는 궁극에 가서는 내 자신이 신(神)과 합치기에 전 인간사회로 조차 자유이어야 하는 그런 「이마쥬」에의 강요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여기 사회 안에서의) 모든 구체적인 것 좋은 것과 맺은 관계에서의 이마쥬를 돕고 있다. 나는 그리고 반드시 나를 들어 이마쥬할 수 없는 핵심(核心)에서 모든 것을 수행해야 한다” 이와는 달리 어떤 프로테스탄적 이마쥬는 사회를 필요악(必要惡)으로 여기고 그것은 마지못한 것으로 하면서 진정한 내면(內面) 또는 생활한 신(神)과의 대면(對面)도 없이 서두르고 있는 것 같다.
사회성화(聖化)의 한 길은 예전(禮典)에의 한 길 밖에 없다. “인간의 본능은 생각과 행동을 같이 함이 절대로 요긴하다. 그것은 벌써 예전적으로 움직임과 같다. 현대 불안(不安)의 원인의 하나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해야 하며 그 다음 어찌 되는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 너무나 복잡한 환경에 놓여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예전은 단순한 의식(儀式)과 혼돈치 말 것이다. “인간의 훌륭한 수사적(修辭的) 연설은 일종의 예정이다. 훌륭한 배우가 대사(臺詞)의 말마디와 그 말마디의 조립(組立)과 몸짓을 하나이 되게하여 그로써 인격화하고 모든 사실을 실연(實演)하고 있는 것은 이를 잘 설명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시간에서의 비약(飛躍)
허위 인생파(人生派)에서 가끔 보는 그 일치(一致)는 놀라운 것이다. 그런 예술가는 인간성에 따라서 성취해야 하고 우리들이 말하는 보다 쉬운 일치 또는 그들 자신에게 의미(意味)를 회복하는 에티케트와 같은 것으로서의 보다 높고 깊은…… 그런 것을 세우려 하지 않고 유리(遊離)된 낭만의 주인공이 되고 있다.
이같은 일은 가톨릭신자인 작가 <그라함 그린<과 같은 이에게서도 볼 수 있다라고 <린치>는 말한다. 의식치 않은 「마니」교의 냄새를 풍기고 있다. “사랑의 종말(終末)” The End of the Affair에서 여주인공은 그녀의 애인을 버리고 신에게 자기를 바친다. <린치>는 그녀의 신성한 것과 인간적 사랑간에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지적한다. 신애(神愛)는 인간으로서의 그 동일한 행동에서 성취될 길은 없다. 후자는 신의 것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신의 것은 이미 성취된 바이며 인간이 그것을 강화하지 않는다 …… 이는 한 해답이면서 그러나 「베아뜨리체」의 눈앞을 지나가는 그런 해답은 아니다. 혹은 시간(時間) 안에 생활하는 것도 아니다. 이는 시간을 비약한다. 이는 인간의 것이 아니다. <그린>의 감정대로 그려진 그것은 가토리씨즘이라기보다 가톨릭소설이라 하겠다.
신학자 <린치>는 바로 실존주의자다. 그러나 그는 <싸르뜨르>처럼 구토(嘔吐)를 일으키게 하지 않고 마치 <다위드>와 같이 결약(結約)의 궤 앞에 즐겨 날뛰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