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66) 光州(광주) 南洞本堂(남동본당)
飛躍에의 猛進軍준비
「家家戶戶 자주 방문할 터」
평신도와 共同努力…
발행일1961-05-14 [제278호, 3면]
성당 입구의 대문이 그 옛날 유생(儒生)들이 드나들던 「성균관」같은 「이조」 건축의 육중한 기분을 준다. 알암들이가 넘을 듯한 「중방」 아래 검은먹 글씨로 옆으로 굴직하게 쓴 달필이 아닌 「천주교회」는 알려진 양학(洋學)이나 천주당과는 주는 첫인상이 성당을 둘러싼 두터운 담과 함께 서양풍을 어쩐지 풍기지 않는다.
1949년 광주 북동에서 독립해서 본당으로 그리고 현 2층 성당을 1953년 건립한 <미가엘> 박(朴文圭) 신부님은 3천2백이란 적지 않은 식구를 늘이고 대본당으로 발전하려던 무렵 5개월 전에 애석하게도 서거하셨다.
성당은 2층인데도 큰 길에서는 잘 보이지 않고 찾기가 힘드는데 광주도청에서 약 2백 「미터」 광주역에서는 약 5백 「미터」의 거리에 자리잡아 광주의 도심지에 위치한다.
첫눈에 본당주보이신 「무염성모」상이 흰 옷을 입고 두 손 모아 위를 쳐다보고 있어 어디서나 느끼는 이 어머님의 경건한 모습을 이곳서도 얻었다. 오후 4시가 훨씬 지난 이때까지 학생들은 배구를 하며 성당 안에서 놀고있다. 혹시 찾는 주인이 계시지 않나 살피니 마츰 한 중년이 넘은 교우 한 분과 담소 중에 있어 기자가 먼저 방가웠다.
『대구 가톨릭시보에서 왔읍니다』 옆에서 이곳 주재 정운수 기자가 소개를 해주었다. 뜻하지 않던 방문자를 맞은 김신부님은 곧 응접실(나중에 알고보니 사무실 겸 식당이다)로 올라오라고 한다. 인사드리고 방안을 살피니 먼저 눈에 띄는 것이 벌써 누렇게 변색한 모조지(模造紙)에 소박하게 옮겨진 『주여 내 입을 긴히 막으시고 내 입에 잠을쇠를 채우소서』 그리고 약간 적은 글씨로 옆에 『내 마음이 악한 일에 이끌리지 말게 하소서』라 한 「성영」의 한 구절이었다. 수백리 먼 길을 찾은 기자를 일깨운다.
『신부님 이곳에 부임하신지 몇 달이 지났으니 사목(司牧)의 방침이 섰겠읍니다』하고 물으니 동석(同席)했던 그 중년이 넘은 교우가 『작년에 차(車) 사고로 수술을 열한 번 치루시고 머리에는 인조뼈까지 해넣으셨는데 아직 건강이 좋지 못합니다』고 대신 설명한다.
이곳 이야기를 묻고 대구의 이야기를 전하며 하는 동안에 쉽게 말을 주고 받게되자 <안당> 김 신부님은 휴양차 이곳서 쉬다가 박신부님이 돌아가시고 곧 장례를 치렀고 한편 자기 몸도 회복되지 않아 그간 성사 집행정도가 지난 일과 였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 지금부터 새 본당 창설과 같은 살림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보좌신부도 오셨으니 어떻습니까』하고 물으니
『이젠 내 몸도 좀 좋아졌고 해서 보좌신부님과 같이 먼저 남녀회장을 임명하고 교우접촉을 해서 일꾼을 먼저 골라야겠어요』 계속해서 김신부는 『다음에 구장을 선정하여 이분들과 함께 2천2백의 교우가 한 가족이 되게 애써야겠읍니다』 그런데 『셋방살이를 하며 자주 옮기는 교우와 가난한 교우들이 또 걱정』이라고……
「레지오·마리에」 군단의 한국본부가 있는 이웃 본당이라 이 본당의 「악숀」의 거의 전부가 「레지오」 활동이라 한다.
이외는 아동·학생 교리반 5반이 있고 성모·안나회가 있다.
교우들 가정생활 실태(實態)를 파악하고 「반」조직으로 충실케 하며 전교에 임하려는 김신부님의 다음 희망은 이 많은 식구가 불편 없이 「천주님과 담소」(신부님은 그렇게 표현했다) 할 수 있게 성당 확장이다.
즉 지금 성당에 T형으로 붙어 있는 와가(瓦家)를 헐고 그 자리에 성당을 세워 도합 1백5·60평 성당을 세우는 것이라고…… 첫 사제직을 이곳서 바칠 <힐라리오> 이 보좌신부님은 몸이 불편한 본당신부를 대신하여 앞으로 일선에 나선다 한다. 『교우들 가정을 직접 찾고 학생 교리를 지도하고……』
정말 이 두 젊은 신부님들은 혼연일체(渾然一體)가 되어 이 본당을 발전시켜 천주의 영광을 헌양할 것으로 보였다.
석양이 긴 그림자를 그으며 온 마당을 덮을 무렵 기자는 신부님들과 하직하고 나오면서 두 신부님의 뜻이 강복을 받고 순조로히 발전할 것을 마음 속으로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