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浦項(포항)본당
이해봇하는 환경속에서도 줄기차게 남의 구령위해 노력
성녀 데레사를 주보로 뫼실 새 성당
발행일1960-06-12 [제233호, 4면]
인구 6만을 헤아리는 동해안(東海岸)의 우수한 항도(港都)며 경북(慶北)의 관문(關門)인 포항 시내에 가톨릭교회가 서게된 것은 다른 지방들에 비해서 늦게 8·15 해방후에도 수삼년을 지낸 다음에야 된 일이다.
1947년 봄에 당시 이지방 관할을 맡아있던 경주(慶州)본당의 <다가리오> 안(安國牧) 신부는 이곳으로 교회를 진출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일이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별세하였던 것이다. 1950년에 이르러 「파리」외방전교회 회원 <루이스 델랑>(南) 신부에 의하여 처음 「삼덕당」(三德堂)이란 이름으로 영천(永川)에서 발족한 「성심의 시녀회」수녀원이 그 모원(母院)과 사업의 본거지를 포항 시외(市外)인 영일(迎日)군 대송면 송정동(松亭洞으로 옮기게 됨에따라 포항 시내에 연락사무소 같은 것이 필요했고 한편 대구교구 당국으로서도 장차 이 지방에 본당을 설치할 준비로서 우선 시내에 약 20여명 되는 교우들의 집회소(集會所)로 쓰기 위해 중앙동(中央洞)에다 2층건물 한채를 마련해준 것이 시작으로서 1950년 4월에는 첫본당 주임으로 <아릭수> 김(金慶佑) 신부를 임명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해 6월 25일에 발발한 동란으로 인해 임시 성당은 불에 타고 김 신부는 성동성당으로 전임(轉任)되어 얼마동안 교회가 없이 지내오다가 1952년 6월에 이르러 교회 유지와 송정동의 <루이스 델랑> (南) 신부와 당시 「오천」비행장에서 미군 해병대에 종군 중이던 <스리반> 신부의 원조로써 <마가리오>(안) 신부가 마련해 놓은 죽도동(竹島洞)에 있는 1천2십3평 부지에다 미 해병대 장병들이 갹출한 4천만원(圓)과 대구교구에서 보조한 5백만원의 공사비를 들여 현재 사용되고 있는 건평 54평 되는 성당과 사제관을 지어 제2대 본당주임으로 <알로이시오> 김(金斗湖) 신부가 부임하여 전교에 힘써왔다.
제3대로 <방지거> 신(辛尙道) 신부 제4대 <벨리스 발셀노>(배) 신부의 시대를 지나 제5대 본당신부로 <삐엘 베르뜨랑>( 안) 신부의 부임후 열심한 전교활동에 감화되어 늘어나는 새 교우들을 다 수용할 길이 없어 지난 3월에 새성당 신축 계획을 세우게 된 것인데 영해예수 성녀 「데레사」를 배출한 「리시어」의 「갈멜회」의 원조와 「로마」성청으로부터 5천딸라의 보조를 받아 4월 8일에 기공을 하였다.
현재 상량(上樑)까지된 소화 「데레사」성당은 오는 9월경에 준공을 해서 데레사 축일인 10월 3일에 헌당(獻堂)식을 거행할 예정이라는데 건평이 147평 되는 훌륭한 건물이다.
1949년에 교우 수는 5,6명이었고 본당 설립후 1952년까지도 관하의 3개 공소를 합하여 신자수가 170명을 넘지 못한 이 고장은 확실히 전교의 옥토는 아니었으니 옛날 「신라」(新羅) 통치 1천년동안 왕성했던 불교(佛敎)의 영향과 바다를 생활의 무대로 하고있는데서 자연히 거칠어진 성격과 완고한 미신(迷信) 등 여러가지 이유에서 역대 신부님들이 드린 공과 노력에 비해 수확이 많지는 못하였다.
현재 이 본당 산하에는 9개 공소가 있으며 신자수는 본당과 공소를 합하여 영세자가 1천2백9명 예비자 1천명인데 앞으로는 영일(迎日)과 영덕(盈德) 두군내 각면(各面)에 한개씩의 공소를 설치할 계획이라 하며 전교활동은 「레지오 마리에」 「쁘레시디움」 단원들이 앞장을 서서 외인과 접촉하고 있다.
「즐거움의 연유」 꾸리아 산하에는 본당에 4개 「쁘레시디움」이 있으며 구룡포(九龍浦)공소에 1개 「쁘레시디움」이 있고 또 두달 전에는 영덕에 정식으로 공소를 설치했으므로 「쁘레시디움」도 조직될 것이다.
교우들의 생업(生業)은 적은 자본으로 장사하는 소(小)상인들이 많아 생활이 안정되지 못해 교회 발전에도 영향이 없는바 아니다.
외교인들에게 교회를 알리는 방법으로는 「쁘레시디움」단원들이 시내 여러 병원을 방문하여 병자를 위문하며 또 대세를 부치는 활동을 하는 한편 예비신자를 위해서는 한주일에 두번씩 교리연구반을 개최하고 있지만 종교에 대해서 별관심이 없어보이는 이곳 인사들에게 크게 반영은 없는 편이며 어쩌다가 구호물자나 분배할 때는 사람들이 많이 모이지만 이것 역시 그때뿐인 현상이라고 하며 자유당 정권 시대에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곳에서도 교회에 대한 탄압이 있어 지난 여러차례의 선거때에는 한달동안이나 교우 선생들과 학생들이 교리공부시간에 나오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내가 내 양(羊)을 알며 내 양도 나를 안다』는 성경말씀을 전교의 모또로 신자들 한사람 한사람의 명단(名單)을 모두 벽에다 써붙이고 교우들의 사정을 생각하고 걱정하면서 줄기차레 인간들의 영혼을 구하려고 애쓰는 <베르뜨랑> 신부는 앞으로의 포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본당이 설립된지 10년이 되도록 이렇다할 발전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앞으로는 좀 더 사회적인 진출을 위해서 일해볼 작정입니다.
그래서 유치원 하나를 설립하겠으며 내부적인 시설의 충실을 기하기 위해서 신축성당이 낙성되면 사제관 신축도 계획하고 있으며 현재 사용하고 있는 성당을 개조해서 우선 급한대로 강당으로 사용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옳은 신심있는 교우들을 평신도 사도로서 양성하는 것이며 이렇게 모든 교회발전을 위해서는 보다 열성있는 기구가 필요한 것입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