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勃先生(장발선생)과 나
석화12종도와 回甲之典
발행일1961-05-14 [제278호, 4면]
지난 4월10일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장 <누수> 장(張勃) 선생의 회갑축하식이 서울대학교 교수회관에서 근천하객(近千賀客)의 운집하에 성대하게 거행됨과 아울러 장학금의 기금을 목적으로 한 동요 및 문생들의 작품 백여 점이 이후 1주간에 걸쳐 전시되었었다. 이러한 때에 즈음하여 선생이 우리 교회를 비롯한 문화계에 끼친바 공로를 살펴봄도 뜻있는 일이라 하겠다.
내가 선생과 사귀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24년 전인 1938년 4월부터의 일이다. 그때 나는 대학에서의 연구생활을 한때 단념하고 현 국무총리인 장(張勉)선생이 교장으로 있던 동성상업학교(東星商業學校)에서 교편을 잡게되었는데 교장의 친제인 장발선생은 이미 10년 전부터 그 학교의 도화선생으로 출강하고 있었다.
장발선생은 독실한 교우의 가정에서 출생하여 일찌기 보성고등학교(普成高等學校)와 동경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 있는 국립미술학교와 「콜럼비아」 대학에서 각각 서양화와 미학(美學)을 전공하고 곧 1926년에 귀국하여 히문고보(後文高普)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한 것을 비롯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35년간을 한결같이 육영사업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그 사이에 있어서 선생은 특히 민족의 해방과 더불어 1946년에 서울대학교가 발족하게 되자 처음부터 동 대학교수 겸 예술대학 미술부장 또는 미술대학장을 역임하여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훌륭한 풍악에다가 강직하고도 예민하여 쾌활한 성격의 소유자인 선생은 그간 수천의 영재를 양육하고 특히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서양화 발전에 있어서는 개척자의 1인으로서 우수한 많은 예술가를 양성하게 되었다. 그 결과 선생은 1949년부터 시작된 전국 미술 전람회의 출품심사위원으로 피임되어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고 1949년에는 서울시 문화상을 받게되며 1954년에는 예술원의 개설과 더불어 특별임명회원으로 피임되어 부회장의 중책을 맡게되고 1959년에는 예술원상을 받는 영광을 얻게되었다.
선생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예술분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平信자로서 전교분야에 있어서도 큰 공로를 세우고 있다. 태중교우로서 고고의 소리를 울린 선생은 신앙면에 있어서 남달리 열심하여 거의 주일마다 성체를 영하고 있는듯이 보인다. 이러한 그의 열렬한 신앙생활은 은연중 많은 미신자들에게 큰 감화를 주게 되어 동요 및 제자 또는 부하인들을 진교(眞敎)로 입교케 하고 있다. 그 몇가지 사실을 든다면 치문(徴文) 시절에는 시인으로 유명했던 정지용(鄭芝溶)을 비롯하여 영문학자 이(李一)교수 철학자 이재훈(李裁燻)교수들을 개종케 하였고 미술대학에서는 두 운전수를 비롯하여 여러 제자들을 영세케 하였다.
이렇듯 열심한 선생은 다만 평신자로서의 전교활동에 힘쓰고 있을뿐만 아니라 보다 한거름 나아가서 평신자로서 수도자의 길을 닦는 일에도 힘쓰고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 「방지거」 3회의 결성이다. 이 「방지거」 삼회(三會)는 이미 구미 각국에서는 오랜 옛적부터 존재하여 왔었으나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왜정말기인 1940년경에 처음으로 서울 혜화동성당에서 당시의 본당 주임신부이던 오기선(吳其先) 신부의 지도하에 결서오디게 되었는데 이 회 결성의 주동인물이 바로 장면선생과 장발선생이었다. 나도 동성(東星) 시절에 장선생 형제의 권유로 다른 동요들과 더불어 이 3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삼회(三會)는 일제의 외국인 탄압정책과 오신부의 전임으로 말미암아 왜정말기 이래 한달에 한 번씩 찾았던 모임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조국이 해방되어 다시 외국인들이 자유롭게 활동하게되니 금년 초부터는 대전(大田)에 본거를 둔 「방지거」 수도원으로부터 「가나다」계 수사신부가 매월 제3주일에 혜화동성당에 내림하여 1백여 명의 회원을 지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에 음양으로 노심(勞心)하고 있는 이가 바로 장발선생인 것이다.
미술가인 장선생은 또한 성화(聖畵)를 그림으로써 미술계 및 교회에 이바지하고 있다. 선생은 1925년 7월5일에 「로오마」의 「베드루」 대성당에서 거행된 우리 순교자 79위 복자의 시복식에 우리 대표로서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 그곳에서 작성된 대폭의 복자성화를 서울 명동성당 동측벽에 옮기는데도 선생의 노고가 많았었다. 그뿐더러 선생은 그해부터 명동성당의 큰 제대 뒤 벽에 12종도의 성화를 그리기 시작하여 다음해에 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최근에는 그의 주도하에 현대식의 혜화동성당을 완성하고 미술대학의 강사인 <헨더슨> 여사로 하여금 현대 미술적인 14처의 조각을 창작케 하여 이를 그 성당 3면 벽상에 걸게 하였다.
이렇듯 장발선생은 비단 교육자 또는 미술가로서 뿐만 아니라 신앙인으로서도 우리나라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게 되었으니 그의 회갑을 맞이함에 즈음하여 문생들이 주동되어 성대한 축하식과 아울러 뜻깊은 작품전시회를 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수연(壽延)잔치를 맞이한 선생의 건강이 더욱더욱 좋와져서 보다 큰 일을 이룩하여주기를 천주께 기구하면서 이 변변치 못한 글을 맺고자 한다. (1961年 4월29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