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성심선전의 使徒(사도) 마테오 신부의 逝去(서거)
발행일1960-06-19 [제234호, 2면]
예수성심(聖心)을 공경하며 그 성상(聖像)을 모든 가정에 모시(奉安)도록 이를 촉진하는 운동을 일으키기에 거의 전세계를 다니면서 열렬한 선전을 해오던 예수성심의 사도 <마테오 크를리 뢰비> 신부가 85세를 일기로 서거하였읍니다. (지난 5월 4일 저녁)
이제 우리는 <마테오> 신부의 평생을 아는대로 살펴보겠읍니다. <마테오> 신부는 1875년 9월 18일 남미(南美) 「페루」공화국 부유한 가정서 태어났읍니다. 부친은 온형가요 모친은 「페루」국 대법원판사의 딸이었읍니다. 앙그리칸(성공회)으로부터 개종한 그의 부친은 종교에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앗으나 1898년 49세로 죽을 임시해서는 참으로 독신한 분이었고 거의 성자(聖者)와 같은 임종을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마테오>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기 직전에 죽었읍니다.
<마테오> 신부를 만나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의 빛나는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고 하고 있읍니다. 사랑과 기쁨에 차있는 그의 음성, 제스츄어(몸짓) 같은 것도 남달리 돋보이는 것이었읍니다만 그러나 그 무엇보다 그의 눈빛은 참으로 인상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마테오> 신부는 이런 말을 하였읍니다. 자기는 큰 희망을 품고서 참 화려한 법률학교를 세워 귀빈들을 한자리에 불러 성대한 개교식을 올린지 불과 몇일만에 지진으로 그만 그 큰 건물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는데 그까닭은 견고히 세우지 못한 탓이라고 하였읍니다.
1907년 건강을 잃고 프랑스 「빠리이 러모니알」로 건너갔읍니다. 예수성심을 성녀 「말가리따 마리아에게 나타나 보이신 바로 그 장소에서 <마테오> 신부의 병은 씻은듯 나았읍니다. 또한 그는 거기서 그의 장례를 결정할 이 사업의 계획 즉 전세계를 다니면서 예수성심공경의 선전을 할 자세한 안을 꾸몄다고 합니다.
<마테오> 신부의 사업은 역대교황님들의 적극적으로 후원하였으며 전쟁중에도 더욱 열렬한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읍니다. 작은 희생과 기구로써 대죄인이 회두하는 것으로 그의 사업의 위력(偉力)을 사람들 앞에 보여줄 수 있었읍니다.
가정에서 밤시간의 성심공경을 널리 선전했읍니다. 『주여 당신은 아무도 당신과 같이 밤을 세우지 않앗다고 불평하셨읍니다. 우리가 다만 한시간이라도 당신과 같이 있을 수 없겠읍니까』하면서 시작한 이 운동은 <마테오> 신부의 말대로 『보십시요 이제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이 밤마다 당신과 같이 있고자 합니다.』고 할 수 있게 되었읍니다. 이 운동은 본당을 중심으로 신자들의 가정으로 먼저 거룩하게 함으로써 본당을 거룩하게 할 수 있는 것이었읍니다.
<마테오> 신부는 신부들과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지도를 수없이 했읍니다. 그때마다 예수성심 상본을 나눠주면서 성심공경의 선전을 간곡히 부탁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는 오래도록 병고에 시달리면서 마치 자기를 천주성의(聖意)에 포기하고 있는 이와같이 그저 고통만 인내하고 있는 것이었읍니다. 의사가 그 의원(左) 다리를 절단했을 때 『성심의 영광에 내 이를 바치오며 또 모든 당신을 공경하는 이를 위해 희생으로 드립니다. 내 이런 고통을 순명(順命)으로써만 아니라 즐겨 받겠읍니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