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당의 내부. 구경거리가 많아서 조선 연행사 일행 중에 들어가 보는 사람이 많았다. 이현주씨 제공
■ 연행사와 북경 성당의 선교사
연행사가 북경 성당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곳에 사는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고, 서학서와 서양의 과학, 문화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흠천감의 실권을 장악한 남당과 동당의 선교사들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은 매우 컸다. 선진문물과 지식 수입이라는 실질적인 이유가 분명했다. 게다가 선교사들로부터 진기한 선물까지 받았기에 북경에 도착한 연행사 일원이라면 누구라도 성당을 방문했다. 연행사의 체험은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의미 있는 몇 가지만 소개하겠다.
김창업은 1712년, 남당을 방문해 천주상, 혼천의, 자명종을 보았다. 1720년 이기지는 무려 아홉 차례나 성당들을 방문했는데, 남당에서 수아레즈(Joseph Suarez, 蘇霖), 마갈헨즈(Antoin de Magalhaens, 張安多), 카르도소(Cardoso, Jean-Francois, 麥大成), 쾨글러(Ignatius Kögler, 戴進賢) 신부 등을 만났다. 이기지는 그들로부터 카스테라, 포도주를 대접받았고 수도꼭지와 같은 설비도 구경했다. 북당을 방문해서는 천리경, 서양고약, 「칠극」 3권, 「곤여도」 2권, 「천주실의」 2권 등을 받았다. 선교사들과 대화한 주제는 주로 동서양 역법의 차이였는데, 깊이 토론하곤 했다.
1729년 김순협은 동당을 방문해 서양화를 보았고, 쾨글러 신부를 만나 고름을 빼는 데에 효능이 있다는 흡독석(吸毒石)과 알레니의 「만물진원」, 서광계의 「벽망」 2권을 받았다. 1765년 동당을 방문한 홍대용의 겸손함과 학구열에 감동한 독일 출신 흠천감정(흠천감의 수장) 할러슈타인(A. Von Hallerstein, 劉松齡)과 흠천감감부(監副) 고가이슬(Antoine Gogeisl, 鮑友管)이 관상대인 흠천감을 보여줬다. 홍대용은 그들과 토론하며 천문지식을 배웠다.
■ 한국천주교회의 자생적 성장
연행사만이 선교사들을 만나고자 한 것은 아니다. 선교사들도 조선에서 온 연행사와 교류하길 원했다. 1720년 이기지를 세 차례나 방문한 수아레즈는 포도주와 고약 만드는 법을 설명해 주며 친분을 쌓았다. 1732년 오스트리아 출신 예수회 신부 프리델리(Xavier-Ehrenbert Fridelli, 費隱)는 이의현에게 알레니의 「삼산논학기」와 아담 샬의 「주제군징」, 서양화를 보냈다. 선교사들은 과학서적 속에 종교서적을 슬며시 끼워주면서, 조선 땅에 가는 방법을 물었다. 조선을 선교할 전략을 세우고 조용히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창기 연행사는 북경의 성당들을 과학지식과 정보수집의 창구로 여겼다. 특히 조선 사신들이 체류했던 옥하관(玉河館) 근처 남당은 흠천감의 선교사들이 사는 곳이어서 연행사가 가장 많이 방문했던 성당이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과학보다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드높아졌다. 연행사와 선교사 교류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장면은 1784년 1월, 서장관 이동욱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아버지를 따라간 이승훈이 예수회 그라몽(Jean-Joseph Grammont, 梁棟材) 신부에게 북당에서 세례받은 것이다.
이후 북당은 조선 천주교회와 연락하는 중요한 장소가 됐다. 1790년 윤유일, 1793년 지황, 1823년 정하상, 유진길, 조신철은 연행사의 일원이 돼 북경을 왕래하면서 성직자를 모셔 오고자 노력했다. 자생적으로 성장한 한국천주교회는 창설 200주년인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내한해 103위 성인 시성식을 집전하는 역사적 순간을 맞이한다. 여기에 이르기까지는 몇 세기 전부터 북경 성당을 방문했던 연행사가 전달자로서 크게 일조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