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聖職生活(성직생활)과 그 年輪(연륜) 25週年(주년)
추억은 즐겁기만 하다
발행일1960-06-19 [제234호, 3면]
성직은 인간의 개성을 성화시켜 천주께로 안내하는 구세주 예수의 대리역행(代理力行) 종신직이다. 그러니만큼 어렵고 고귀한 직이어서 인간의 힘만으로서는 잠간동안이라도 봉행할 수 없고 또 해서는 안되는 생활인 것이다. 예수 안에서 예수와 함께 즐거이 수난하며 불쌍한 영혼의 회개를 호소하는 기구와 희생적 선덕생활에 열중함으로써만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만민을 가르치라 거룩히하라 다스리라 분부하신 예수께서는 나 너희들과 함게 있으리라 하셨으며 또 「바라클리도」 성신을 보내어 진리를 증명해주시리라는 약속을 이행해주시매 모든 성직자가 성직을 성실히 봉행하게 되는 것이다. 즉 성직생활의 생명과 같이 필요한 덕행 지도의 대상이 되는 모든 사람들의 심리동향에 대한 여실한 통찰 평소 취급하는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판단 인내와 노력으로써 환경의 융통 등 모든 조건이 매일 아침 미사성제 봉헌과 성무일과인 경본봉송에서 예수와의 일치가 강화되고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려는 일을 계획하고 촉진시킴에 여념이 없으면서도 계속 부족을 느끼며 부단노력함에서 실현되고 거기서 예수 부활후 종도들에게 선사하신 마음의 참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금년 6월 15일로서 성직생활 25주년을 맞이함에 즈음하여 김각히 감상하고 기뻐하는 세가지가 있어 인사삼아 지인들에게 삼가 아뢰고자 한다.
선배 신부님
승품 익일인 1935년 6월 16일 성삼주일 승품축하 오찬회 석상에서 12 동거동창 새 신부들과 함께 고(故) <폴로리아노 더망지> 안 주교님으로부터 임지 발령을 받는데 경상북도 전라남북도 각 지방이었다.
내게는 경남 통영군 동부면(거제도) 명진리 새본당으로 가라는 발령인데 단 바로 이웃 옥포본당 겸 <바오로>(厚相) 신부님의 보좌로서 당분간 일하라는 지시였다. 법적 연령 25세에 1년이 부족됐으나 교황성부의 특별한 윤허가 있어 동기들과 함께 승품됐으니 스물네살에 건강좋고 활발한 성격에 또 호사벽(好事癖)을 가진 청년신부로서 고도한촌(孤島閑村) 포교생활 발령에서 가톨릭의 순종 사랑의 희생 호혜적(互惠的) 번영을 즐거워 하면서 지체없이 임지로 떠났다. 당일 통영항구에 도착하여 나의 청춘을 희생의 제물로 요구하는 구름너머 바다 속 고도(孤島)를 그리워하면서 뜬눈으로 일박한 후 하늘과 물이 어울린 묘망한 해양(海洋)의 거센 물결을 헤치며 용진하는 「하야후사마루」란 철선에 몸을 싣고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섬이라도 좋으니 오래 살데로 가자고 뱃머리에서 노래를 불래봤다. 정말 상쾌했다.
서도(嶼島)는 정서의 나라요 예술의 나라분이 아니라 바라보니 사방에 끝이없는 바다위에 또 바다요 죄없는 갈매기떼의 상쾌한 비상(飛翔)뿐이니 철학의 나라요 신비의 나라이기도 했다.
두시간 항해(航海)에 처음 닿는 곳이 하청만(河淸灣)인데 수많은 신우들이 마중을 나와 반가이 맞아주며 옥포본당에로 안내했다.
본당 <바오로> 김 신부님은 감격에 넘치는 친절을 베푸셨다. 해변지대 나지막한 산기슭에 위치한 마을복판에 아담스러운 성당이 섰는데 사제관 교우사랑 식관이 보기좋게 배치됏고 화단이 아주 아름다웠다.
깨끗하고 성스러운 분위기가 편만(遍滿)된 영적 생활의 위안소이다. 이 성당을 세우고 도민들의 영적생활을 지도하시는 김 <바오로>(厚相) 신부님은 벌써 7년전부터 이곳에 오셔서 도민들의 영적 아버지로 존경을 받고 가셨다.
일상생활을 함께하면서 성직생활 출발점을 배우는데 일동일정(一動一靜)에 감복아니할 수 없는 예의동방(禮儀東方)의 군자이오 가톨릭성직자의 전형(典型)이었다.
너무 조심스러운 점에서 거북하게 느끼지면서도 그 따스한 맘씨에서의 고운 정서와 풍성한 이해와 동정에 스스로 감응되어 더욱 가까워졌다.
위해 주시는 훈육은 신학교 훈육에 비겨 보다 더 감격적이며 현실적이오 베울짜는 격의 조직적이면서 심열을 풍겨주었다.
신부는 자기 직무에 열중해서 시간을 낭비하지 말하야 한다고 늘 말씀해주셨다. 그러기에 장기 바둑을 피하셨다. 아직도 당신이나 내나 장기 바둑의 말이 가는 길을 모른다.
환자가 있어 종부를 청하면 밤중에라도 섬나라 험한 태산준령을 걸어넘어 30리 왕복을 흔연히 하시면서 나와같이 일을 하되 나모양 다리 병신이는 되지말아 하시던 교훈담이 어제 일과 같이 생생히 기억난다. 교우 가정에 불목이 있어 시끄러우면 조용히 심방하여 식구를 불러놓고 그앞에 무릎을 꿇고 본당 신부가 덕을 갖지 못해서 교우가정에 불목이 생기고 표양이 나빠진다고 눈물겨웁게 타일러주시면서 화목을 공작하시니 이런 착한 목자를 어느 뉘가 따르지 않으랴!
냉담자가 없고 관면혼배가 한건도 없도록 알뜰히 신자들의 영적 생활을 보살피셨다.
십자성호로부터 가톨릭의 사회문제에 이르기까지 경문과 교리와 정신과 사상을 철저히 가르치셨다. 진실로 착한 목자이셨다.
어느날은 나를 보시고 이 신부는 이제 때가 왔으니 발령된 명진 새본당으로 가야지요 하시면서 내 대신 옥포본당에서 일을 하면 당신이 명진에 가서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하셨다. 어쩐줄 모르게 미안하고 고맙고 기쁘기도 했다. 참 다기적(多技的) 솜씨를 가지신 분이다. 언제 목공일을 배우셨는지 일류 목수이었다. 양공(良工)은 나무 한토막도 버리지 아니한다더니 김신부님은 규격맞게 설계해서 여축없이 나무한토막도 버리지 않고 집을 지어놓으셨고 당신 손으로 제대마저 만들어주셨다. 이런 고맙고 훌륭하시고 성자적(聖者的)인 신부님이 또 어디 있겠느냐고 감격아니할 수 없는 심경으로 천배만배(千拜萬拜) 감사드리고 명진 새 본당으로 왔다.
명진은 7십호로 구성됐고 높고 험한 계룡산 기슭에 자리잡은 일컬은 고도한 촌이다. 일에대한 왕성한 욕망을 가진 청년신부로서 이상을 실현시킴에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기에는 매우 어려운 지대이다. 퍽으나 답답하고 괴로웠다. 김 바오로 신부님은 자주 오셔서 직무에 열중하며 시간을 낭비하지마랄고 분부해주셨으나 어쩌면 좋을지 모를 도가니 같이 옴팍하고 적은 마을에 본당 고해자는 50명 뿐이고 성당구내는 총 백50평뿐니 신심함께 옹색했다. 어쩌면 이지방 주민들의 영혼을 개척함에 마음을 달리는 전교신부의 혼이여! 하고 자열(自悅)할 수 있을고 하는 것을 모색(摸索)함에 바쁘기 시작함을 배웠다.
예수님이 이와같은 촌에서 전교생활 출발을 준비하셨으니 나도 터전을 잘 잡앗다는 점을 만족하는 정신을 배웠다. 그래서 까마득 높은 바위 언덕 밑에 자그마한 우물을 하나 파서 「나쟈렛우물」이라 부명(附命)하여 세멘트로 틀을 짜서 넣고 보기좋게 치장했다. 물맛도 약수같이 좋았다.
오늘도 있으리라 추억하니 무척도 즐거웁다. 그로부터 마음이 착근(着根)되어 단조한 성무를 집행하고 나면 일본말을 배우기에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이는 일본시대이니 일본말과 문에 능통하여야만 사람들을 널리 알고 깊이 위해서 그들의 영혼을 천주께로 안내해 오는데 자신이 생기리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진진포포(津津浦浦)로 다니기 시작했다. 미신자마을 동사무소에서 가끔 미사도 드리게되었다. 섬사람들을 사괴고보니 육지 사람보다 융통성이 있고 인정도 풍성했다. 무서운 파도위에 운명을 싣고 멀고 가까운 나라를 휘돌면서 각 항구 사회에서 받아온 문화의 선물인가도 느껴졌다.
신문교우들을 구해놓고 찾아갔다가 배를 타고 떠나오면 그 배자체가 가물가물 사라질 때까지 곱게핀 동백나무꽃 밑에서 다시 와달라는 신호로써 손을 저어주는 정겨운 그모습은 아직까지 기억에 새롭게 호인상을 남겨준다. 이렇게 재미붙여 일해가는줄을 모르고 그 섬나라 자그마한 촌에서 얼마나 고생할까 염려해주는 지우가 어느날 찾아와서 반조각이지만 아주 흥미있고 위안제(慰安制)인 한시를 선사해주었다.
滿庭明月은 無煥燭이오
入座由影은 不速賓이라
이 뜻을 주해해보면
뜰앞에 가득찬 명월은 연기없는 등촉인데 구태여 전기가 밝은 도시가 그리울 것 없고 때가 되면 날마다 어김없이 방안에 찾아드는 산그림자는 이 신부를 제일 신비롭게 오래 친해주는 벗님일텐데 구태여 죄많은 도시인들을 벗삼으려 할배없으리라 함일게다.
그래서 걱정마오 내게는 위없이 만족해서는 이 섬나라 한촌이오 고스란히 이곳에서 일생을 늙히고 뼈를 묻을 때까지 일해갈 것을 행복으로 했오라고 답례했다. 정말로 만족했으니 만큼 지금도 때때로 그당시 그마을에서 관계하던 모든 일들이 천만리 추억의 캐불카에 태워 오고가고 할 적마다 자꾸만 나의 제2산실(産室)인양 그리워진다.
나의 성직생활의 은사(恩師)이신 바오로 김후상(厚相) 신부님은 그 섬에서 16년간 하루같이 일하시다가 상사(上司)의 부르심으로 눈물지우며 이 섬나라를 떠나셨고 나는 9년만에 역시 눈물지으며 고도한촌을 떠나왔다.
이처럼 좋은 선배신부님께 성직생활의 출발점을 배워왔으므로 25주년을 맞이한 나의 생활에 아직도 그때의 열의와 용기가 식어지지 아니했음을 헤아린 제 선배 김 바오로 신부님으 지도의 결과이라 믿고 나의 성직생활 전정(全程)의 은인으로 모셔야 할 의무를 성실히 깨달으며 진심으로 감사드리면서 신부님의 수범적 성직생활의 덕화 더욱 융성하기를 축원하는 바이다. (大邱·三德 主任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