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마리아의 선교자(宣敎者) 프란치스꼬회 수녀원
사업은 먼저 여성교육부터
횡령산 기슭에 「아씨씨의 적은꽃」자매들
진료소 직업보도소도 설치 예정
발행일1960-06-19 [제234호, 4면]
부산 서면(西面)에서 동래(東萊) 방향으로 뻐스를 타고 「자수영」을 지나 창문을 내다보면 황령산(荒嶺山) 기슭에 우뚝 솟은 화려한 건물이 지나가는 이들의 이목을 끌곤한다.
부산 본토박이들에게 물어보면 「황령산」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옛날엔 4월 초파일과 5월 단오(端午) 날의 황령산 놀기는 그당시 부산 주민들의 유일한 명절놀이며 민속(民俗)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이름있는 산허리를 무너뜨리고 개척하는 이곳 「양정」(楊亭)동의 「마리아의 선교자 프란치스꼬」수녀원을 방문한 기자를 아직 건설작업에 분주한 몇사람이 낯설은 손님을 의아스럽게 흘겨볼 뿐이다.
주인을 찾는 기자에게 유창한 일본말(日語)로 맞아주는 하얀 수도복에 안경낀 <마리드 센 엘리에> 원장수녀님이 말하는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이 수녀원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약 2년전인 1958년 6월 26일 일본에서 처음으로 5명의 외국인 수녀와 6명의 한국인 수녀님들이 건너와 적기(赤崎)라고도 불리우는 바람이 센 동항동(東港洞) 교회의 부속건물에 임시 자리를 잡고 이곳 주민들과 정을 들여 오다가 1년전 일본에 있는 동회 극동지구 <마리 드 꼬르벨론> 관구장의 한국시찰시에 항도 부산에 한국본원(母院)을 건립할 것을 결정코 「로마」본부의 승인에 성공하여 이곳 「황령산」기슭에 1만4천여평의 터를 사서 작년 6월 건평 400평 되는 철근 콩크리트 4층건물의 수녀원 본관 건축을 착공한 것이 금년 5월에 준공을 보게되어 지난 5월 19일 이곳으로 감격적인 이사를 하게된 것이라고 한다.
부산교구 감목 <요왕> 최(崔再善) 주교의 요청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진출한 이 수도회는 1899년 <수난의 마리아> 동정녀에 의하여 프랑스의 「상부류」에서 창립한 이래 성 <비오> 10세 교황께서 이 회의 발전을 가르쳐 『기적적이라』하실만큼 신속히 발전하여 현재 전세계에 걸쳐 약 4백처의 수녀원에 9천명의 회원을 거느리고 있으며 지금은 그 총본부를 「로마」에 두고 교육사업과 사회사업을 하는 큰 수도단체로서 한국진출은 늦었으나 이웃나라 일본에는 이미 1897년에 진출하여 가깆에서 병원, 양로원, 요양원, 보육원, 학교 등을 경영하고 있으며 특히 「도오꾜」(東京)에 있는 「국제 성모병원」은 그 명성이 높다.
이 회는 원래 「아씨씨」의 성 <프란치스꼬>의 정신을 본받기로 발족한 수덕(修德)단체인만큼 1885년 8월 12일 정식으로 「성 프란치스꼬회」 총장의 직접 지도아래 속하게 되었으며 1890년 7월에 수도회로서의 인정을 받았고 1896년에 회헌(會憲)의 재가(裁可)를 받았으며 1922년 <비오> 11세 교황으로부터 교회법에 의한 인가를 받은 단체이다.
관상(觀想)생활과 교육사업 및 사회사업을 통해 전교활동을 하는 이 회는 회원들이 교대로 30분 동안의 성체조배를 중심으로 관상생활을 하는 동시에 대외활동은 교육사업만이 아니라 인쇄(印刷) 노동에 이르기까지 전교에 필요한 일은 거의 다 하고 있으며 「버어마」의 「카침」산중과 「티베트」같은 세계의 벽지에도 이 회의 지부수녀원이 있어 미개지(未開地)에서 악성전염병자를 간호하다가 희생이 되는 것쯤은 예사일이며 1900년에는 중국 산서성(山西省)에서 일곱분의 수녀가 순교했는데 그분들은 1946년에 복자위에 시복(諡福)되었으며 1947년에는 인도의 「카슈밀」에서 부원장이 치명하였고 1904년에 세상을 떠난 이 회 창립자 <수난 마리아> 원장과 중국에서 별세한 <마리아 아순따> 수녀와 7명의 순교복자들을 성인위에 오리기 위한 3건의 시성(諡聖) 심사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것이 이 회의 자랑이다.
부산 양정동 산허리에 본워자리를 잡고 이 회가 앞으로 할 사업은 먼저 여성교육에 두고 교실과 시설의 미비로 허덕이는 향학도(向學徒)들의 꿈을 이루게 해 줄 배움의 터전을 만드는 것으로써 900명을 수용할 여자중고등학교를 개교할 계획이다.
약26개의 교실과 강당, 도서관, 가사실, 실험실 등 현대식 시설로 만들어질 이 학교는 불원간 착공하여 금년내로 준공을 보아 명년 봄부터는 알뜰한 어머니가 될 신입생을 모집할 것이라고 한다.
아직 학교 이름은 미정(未定)이지만 건물의 준공될 무렵 정문(正門)에 큰 「루르드성모상」을 건립할 것인데 그후에 학교 이름은 결정하겠다는 것.
그리고 이 회의 일꾼이 될 수도생활 지원자를 모집하여 수녀를 양성할 것이라는데 이 회의 조직은 입회(入會)지원기 1년, 수련(修練)지원기 1년, 수련기 2년, 종신허원전 유기(有期)허원기 3년의 단계로 되어있다.
사회사업으로는 장차 직업여성들을 위하여 수예부(手藝部)를 마련할 예쩡인바 현재 20여명의 처녀들이 이미 기술연마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 앞으로 수녀원 본관과 학교건물 사이에 현대식 시설의 진료소(診療所)를 시설할 것으로서 우수한 기술을 가르치는 동시에 가난한 병인들을 치료하여 줄 것이라고.
이렇게 눈부신 설계를 쇄하는 원장 수녀님은 이야기 도중 『한국의 교우들은 신앙심이 두터워요, 일본인이나 다른 어느나라에 비할바 없는 교우들입니다.』라고 2년간의 한국의 인상을 말하면서 희망과 보람을 기대하는 얼굴표정에 미소를 띄우곤 했다.
아직 5명의 외국인 수녀와 6명의 한국인 수녀로 불과 11명밖에 없어 다른 나라에서와 같이 늘 일명씩 교대로 성체 앞에 기구하며 성체를 계속해서 지켜야하는 규칙을 못지키고 있는 것이 유감스럽다고 하소연.
하직하고 돌아서는 기자는 인근 주민들의 여론을 들어볼 생각으로 어떤 중년신자에게 말을 건너보았는데 이동리 동회장(洞會長)이었다는 김씨는 『수도원이 우리 동리에 서게된 것은 더 바랄 수 없는 기쁨이며 특히 앞으로 학교도 건립된다고 하니 주민들은 큰 기대를 걸고 있읍니다. 벌써 우리 주민을 위하여 공동우물(井)을 깨끗하게 시설하여 감사한 마음 금할 길이 없읍니다.』고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