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깐=NC】 「옷세르바토레 로마노」의 새 편집인 <라이몬도 만치니>씨는 이 세기의 첫해에 탄생했고 그때는 벌써 「이타리」에서 교회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당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는 성직자들은 새 「이타리」의 공적생활에 자기들의 자리를 이을 젊은 세대를 훈련하고 있었다. <만치니>씨는 1901년에 「이타리」 북부의 「미라노」 근방 공업지대인 「로디」에서 탄생했다. 1920년 그는 「미라노」 공업학교에 입학했고 당시 반교회적인 「공화청년 클럽」에 가입했다. 전투적인 사회주의가 공업지대인 「미라노」에서 강력한 기초를 닦고 있을 때였다. 그 도시의 「라 카사 델포폴라」(인민의 집)이 사회주의의 학교이었는데 바로 그 학교에서 「로마냐」지방 출신인 젊은 학생 <베니토 무솔리니>가 퇴학을 당했었다. 당시 「미라노」의 대주교 <훼라리> 추기경이 젊은 사회주의자들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 가톨릭청년연맹을 창립하고 가장 열성있는 자기 사제에게 그 기도를 맡겼다. <라이문도 만치니>는 학생시대에 <훼라리> 취기경의 젊은 가톨릭 운동자들과 자주 접촉하게 되어 그 신덕과 열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마침내 『파울리니』라고 불리우는 가톨릭지도자들의 단체에 가입해서 반교회주의의 득세에 따라서 거리, 광장, 공장에까지 가두로 진출해서 그들과 대항했아. 미남자였고 박력있는 웅변가였던 그 교구의 기관 일간(라베니테 드 이탈리아」가 파산의 비운에 빠졌을 때 「파울리니」가 떠맡게 되었다.
가톨릭 악숀의 출판에 경험이 있는 <만치니>씨가 기사취재로 「로마」에 파견되었다가 다시 소환되어 「라베니레 드 이탈리아」의 주간이 되어 26세 때에 처녀사절을 쓴 이래 「옷세르바토리」의 편집인이 될 때까지 32년간 계속했다. 그는 「화쓰씀」이 한창 횡폭할 때 「옷세르 바토레」처럼 공개적으로 대항은 못했으나 「라베니레」는 <뭇솔리니>의 칭호 「두체」를 소(小)문자로 인쇄했었다.
그 당시의 정세를 고려할 때 그는 「화씨스트」 정권과 논전한 <비오 11세> 교황의 출판에 관한 담화를 큰 용기로써 행동화했다. 「나치스」 군대가 「이타리」에 주둔중에도 그는 유태인 문제에 관해서 가톨릭원칙에 입각해서 「화시스트」의 신문과 공공연히 투쟁해서 교회의 보편성과 인간의 평등을 주아했다. 종전후에 그는 정계에 투신해서 「기민당」과 「이타리 신문 연맹」의 간부, 제헌국회 의원, 수차의 민의원 당선, 「마리오 셀바」 내각의 각료를 역임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