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倭館(왜관)본당
6·25의 희생은 헛되지 않아
교회가 차지한 사회적 권위는 전국제일
성분도 수도원의 소재지로
발행일1960-06-26 [제235호, 4면]
동은 지천면(枝川面) 남은 달성군 하빈면(河濱面) 북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약목과 성주군 선남면(船南面)에 접하고 있는 칠곡군(漆谷郡)의 중심지 왜관읍(邑)은 인구가 약1만5천에 불과한 작은 읍내지만 한국가톨릭교회 안에서는 한 교구(敎區)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도시(都市)가 되었다.
1952년 7월 북한의 덕원(德源)에 자리잡고 있던 성 분도수도원이 그 재건(再建)의 기지로 38선이 무너지고 남북이 통일되는 날까지 이곳에서 북진(北進)의 준비를 가출 근거지로서 이곳을 택한 것이 계기가 되어 그후부터 이곳에 세워지기 시작한 수도원 시설과 교육사업의 확충은 이 지방에 커다란 혜택을 입게된 것이다
거금 57년전 경부선(京釜線) 철도가 개통될 때 옛부터 낙동강의 주운(舟運)을 이용하여 깊은 골의 산물들이 모여들고 실려나가는 집산지(集散地)였던 이곳에 왜관역을 설치하므로써 황무지 모래땅에 동리가 일어나게 되었지마는 가톨릭진리의 복음이 이 고장에 들어온 것은 이 고을 역사에 못지않게 오래된다.
즉 1886년 한국교구 제7대 감목 백 주교께서는 대구(大邱)본당(실은 慶南北 全域을 설정하고 첫본당 신부로서 <바오로 로벨도> 김(金保錄) 신부를 임명하셨지만 박해로 대구성 안으로 부임하지 못하고 「신나무골」이라 불리우는 현 연화동(蓮花洞)에 숨어서 2년간 전교하였는데 그당시 <안드레아> 이(李以全)씨 집안에 있었다 한다.
이 본당의 연혁(沿革)은 대구 다음으로 경북에서 가장 오랜 본당인 『가실』이라 불리는 낙산(洛山)본당(1894년 설립)에서 1928년에 분리설립된 이후 <빅돌< 여, <까다르스> 강, <로벨드 리샬>, <베드루> 노, <유리오> 한, <야고버< 이(李明雨), <요안> 김(金永濟), <요셉> 김(金在石), <야고버> 이(李己守), <아오스딩> 노(盧圭採), 현 <베다> 김(金英根) 신부에 이르기까지 열한분의 주임신부를 뫼시었으며 왜관읍 북부(北部)와 칠곡군내 약목(若木) 북삼(北三) 인동(仁同) 석적(石積) 지천(枝川) 등 5개면에 걸쳐 신동(新洞) 연화동(蓮花洞) 인동(仁洞) 금전(金田) 등 4개의 공소가 있으며 교우 총수는 본당곽 공소를 합하여 지난 5월말 현재로 3천3백52명인바 이는 재작년 9월 현재의 2천7백명에 비해 2년간에 50%인 1천3백48명의 증가인 것이다.
교회내 단체로는 청년회와 성모회가 이전부터 있었으나 「레지오 마리에」운동이 시작된 다음부터 다른 단체의 활동은 미약해져서 청년회는 자연 해체가 되고 성모회만은 아직 모임을 계속중인데 「레지오」운동은 이 본당이 성분도회 신부님들이 전교를 맡고있는 본당들의 주교좌본당과 같은 성격에 비추어 「꼬미씨움(교구평의회)」이 설립되었으며 현재 「천주의 성모」꼬미씨움 산하에는 3개 「꾸리아」와 본당 산하에 10개 쁘레시디움이 있다.
매일 두차례 미사가 있으며 주일날에는 세번 울려지는데 전례(典禮)운동이 철저히 보급된 이 성당에서 교회의식을 참례하는 것은 그야말로 나 자신이 같이 예전에 참여하며 모두 같이 기구하고 있다는 깊은 감명을 받는 동시에 신공에 참예하는 기쁨을 느끼게 한다.
성당 동북쪽 언덕위에 앉은 성분도수도원의 웅장한 건물과 성당 뒤 언덕위에 으젓하게 자리잡고 있는 성 마오로기숙사, 또 남쪽으로는 그동안 신축되고 증축된 순심중학교의 큼직큼직한 건물들이 있는 현재의 왜관성당 부근 풍경을 보는 이들은 10년전의 광경을 연상하기 힘드리만치 이젠 6·25때의 처참한 상처도 완전히 가시어졌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공산괴뢰군대와 우리측 군대가 몇차례 밀고 밀리고 하는 동안 이 왜관은 완전히 쑥배밭이 되었던 것이니 1950년 8월 3일 피난명령이 내렸다가 9·16의 진격이 시작된 다음 10월 3일 수복(收復)하였을 때 왜관읍은 3,456호중 1,889호의 가옥이 불타버렸고 195호가 파괴되었으며 시체와 탄피(彈皮)는 산과 들에 너저분하게 쌓여 있었으며 B29폭격기 백대가 5메타 간격에 폭탄 한개씩을 내려 쏟은 결과 산(山) 모양이 변하리만큼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처참한 전재(戰災) 속에서 교회에 어찌 피해가 없을 수 있겠는가. 성당은 두군데 큰 폭탄을 맏아 천정에서 아래 지하실까지가 바로 뚫어졌고 인민군병원으로 사용되었던 성당 구내에서 29구의 시체를 캐내는 참혹한 현상이었다.
그 처참한 환경과 딱한 사정 가운데서 그 뒷정리를 맡아 새로 신축하는 것이나 다를배 없는 성당수축공사를 시작했던 당시의 주임 <야고버> 이(李己守) 신부님의 가슴아픈 심정과 뼈아픈 노고는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아 9·16의 공산반격 기지는 장차 북진통일의 정신적인 기지(基地)가 될 성분도수도원의 본거지가 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