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암마가우」는 바바리아지방 「뮌니히」와 「아우그스벨르그」로부터 60마일 들어선 산촌이다. 이곳이 바로 매 10년에 한번씩 상연하는 수난극(受難劇)으로 전세계 수많은 관객의 주목을 모으고 있는 곳이다. 지난번은 1950년에 있었으며 『「오바암마가우」의 상연은 일종의 신앙행위이며 서구(西歐) 그리스도교의 르네쌍스와 같은 구실을 한다. 이 유명한 수난극은 가장 위대한 전통문화의 소산(所産)으로서 또한 변천하는 시대로부터 보존(保存)될 가장 귀중(貴重)한 연극이다』라는 정평을 받았다.
이곳 알프스 산맥(山脈) 바바리아의 산골 역시 1934년부터는 격심한 세태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나치스」전쟁 전후의 혼란 등은 그들의 아들을 싸움터에 죽이고 또한 궁핍에 허덕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50년 그들은 「바바리아」 정부로부터 백만「말크」의 대부(貸付)를 얻어 수난극을 공연코자 했다. 이로써 그들의 맹서(盟誓)를 지키려는 것이었다.
그들의 맹서에는 이런 사연이 있다. 1633년 페스트(黑死病)가 전구라파를 휩쓸지음 「오바암마가우」도 누구 한사람 그곳을 나올 수도 들어갈 수도 없게 격리되었다. 그때 구라파의 도시와 촌락은 이 병에 의한 사망으로 인구가 줄다싶이 했다.
치병(治病)에 전력을 기울였지만 죽음의 그림자는 아내와 아들을 파묻고 다녀온 남편에 마저 따라왔었다.
이같이 모든 가정이 죽음의 공포 속에 파뭍혀 있을 때 동리 어른들이 모여서는 『자 이러니 어쩌면 좋으냐』는 의론을 했다. 그때 신부는 열심이 기구해야 한다고 했지만 기구만으로는 족하지 않으니 무엇인가 행동을 일으키자는 지배적 의견으로 누가 제안한 『매10년마다 우리 생애를 바쳐 그리스도의 생활을 그대로 옮기기로 약속을 하자』는 말대로 그들은 그길로 성당에 가서 맹서를 하게되었다. 그로부터 「오바암마가우」는 페스트로 죽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었다 한다. 그들의 맹서는 그 후손들까지 이를 받들었고 열일 제처놓고 이것을 실행케되었던 것이다. 1634년 제1회 수난극은 마을본당 마당에서 올린 지극히 초라한 것이었다.
허나 몇백명의 관객(농부들)밖에 없었던 것이 만3백년째 되는 기념공연에는 전세계에서 2만2천명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5천2백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을 작만했고 7백5십명을 출연시켰다.
이 수난극이 명성을 얻은 것은 1770년부터였다. 신문, 잡지는 통신기자를 영국, 프랑스, 이태리서는 왕족들이 이곳까지 구경왔다.
그후 독일서는 모든 종교극의 금지령을 내린 일이 있었지만 「오바암마가우」만은 예외로 돌렸고 1870년도 무사히 지냈으며 그후 1930년까지 아무런 방해없이 계속되었었다.
1934년은 그 첫번으로부터 3백년되는 기념제를 지냈다. 이것은 지금껏 지낸것 중 잘된 것이었다. 허나 그것은 거의 최후의 것이 되고 말았다. 「나치」 치하에서의 1940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바암마가우」에서 수난극을 하게되면 각지서 오는 수많은 관객으로 마을을 채운다. 집집마다 손님으로 가득찬다. 2천5백명 남직한 이곳은 2만을 넘게된다. 손들은 각 가정 또는 호텔에 배당하고 그 지불은 위원회서 받아 극장입장세와 함께 방대한 경비에 충당한다. 또 모든 경비를 제하고서 남은 돈은 각 가정에 생활비로 나누기도 하고.
1950년 차용(借用)한 백만말크는 전쟁때 파괴된 극장을 수리하였다. 배우들의 보수는 없는 수가 많았다. 그러나 1934년의 경우 그들의 수입은 1백만말크에 달했다. 연극의 준비는 한해전부터 시작된다. 남자들은 머리털과 수염 기르는 명령을 받는다. 아무도 이를 거절치 못한다. 처벌규정까지 있다.
사람들은 연극의 준비에 열중한다. 본직을 제쳐놓고 위원회서 명령된 자기 역(役)을 위한 모든 준비를 해야한다. 집을 떠난 소년소녀들도 이때는 돌아와서 배당된 배역(配役)을 연습해야 한다. 본당신부와 대의원들까지도 배역에 한몫을 차지해야 한다. 위원회는 미리 마련된 헌장(憲章) 그대로 진행하고 또 거기 제정된 모든 법률을 엄수하는데 이것은 모두 문서화된 것으로 세대를 이어온 것이다. 이 준비기간중 준비위원회의 한마디는 「오마암바가우」에서는 적어도 법률과 같은 것이다.
2천2백명 「오바암바가우」 주민들이 이 준비기간중 할 일은 태산같다. 극장을 수리하고 새로 장식해야하고 산뜻이 칠해야 하고 코러스의 맹연습, 습관(習慣)을 글러사하게 고쳐야하고. 이곳 주민들은 적어도 한가지 이상의 예술을 몸에 지닌다. 학교에서 그렇게 예능을 위한 교육을 아이적부터 받게한다. 그 가운데서도 음악과 연극에 소질이 있을 때는 특별히 가꾸어주고 교사로서도 음악 연극에 훌륭한 자질과 실력을 구비해야 한다. 그것을 교사의 중요한 자격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오바암마가우」사람들의 타고난 예술적 기능(技能)은 곧잘 사회학도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 역사가들은 그들이 「튜론」의 후예이라는 거와 켈트 및 이탈리 혈통을 강력히 물려받고 있음을 주장한다. 사실 이곳에는 2백명이 넘는 목조각가(木彫刻家)들이 살고 있으며 또 그만한 수의 도기공(陶器工)들도 있다.
마을 박물관에는 그들의 2백50년의 찬란한 예술적 걸작을 간직하고 있다. 「오바암마가우」의 이들 예술가들은 성상 십자가를 깎고 작난감 그밖의 수공품을 만들어서는 전구라파를 다니면서 행상(行商)을 하고 있다. 1차대전 직후에는 그들의 대표를 미국에 보내고 많은 공예품을 팔고자 했다. 이 시도(試圖)는 성공적이었다. 「오바암마가우」의 여성들은 바누질에 능하였다.
「오바암마가우」의 아이들은 일찍부터 연극을 사랑하도록 배운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그런 분위기 가운데 장차 그 한몫을 맡도록 성장된다. 그때문에 어른들은 아이들의 성장에 깊이 주목하고 그 소질을 찾기에 세심한 관찰을 하여 그런 것을 자료로 장차 위원회를 통해 누구든 베드루 누구는 마리아 하고 결정하게 된다.
배역(配役)이 정해질 무렵해서 사람들은 누구는 베드루 빌라도 야곱 마리아 막다레나 혹은 가이파스 하고 떠들석하지만 역시 선망의 대상은 그리스도와 마리아인듯하다.
매역은 신성한 의무이요 오직 위원회서 지명하는대로 정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역은 투표로 결정하여 지명에 대신하고 있다. 여기에는 두 주간의 토의기간도 있다. 위원들은 공동으로 미사에 참례하고 도우심을 구한다. 투표에도 여러 단체를 두는 수가 있다. 이만큼 신중이 다룰 필요가 있는 것이다. 배역발표가 나오면 히비쌍주곡이 나온다. 그리스도 역(役)에 당선된 자가 으뜸이요 마을의 지배적인 거와 사실 중요인들이 된다.
「오바암마가우」에 수난극 준비가 다되어가면 현대독일의 모습은 차차 사라지고 초대(제1세기) 예루사렘이 된다. 사람들의 입성 그리고 택시운전수들까지 마치 성경에 나오는 대제관처럼 된다.
그들의 열연(熱演)은 사람들을 움직여 놓고야 만다. 코러스 연습도 맹훈련을 거듭하고 아무리 간단한 역(役)이라도 충분한 연습을 하고 있다.
전야(前夜) 7시 밴드는 온거리를 다니면서 연주를 하고 이튿날 6시 개막 대례미사와 전원이 영성체하고 나면 7시30분 대포소리로 극장 문을 열게 된다.
수난극이 시작되는 시간은 정확히 8시 그리고 8시간 계속된다. 이동안은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극은 그리스도의 화려한 예루사렘 입성(入城)에서 시작하여 승천으로 끝맺는다. 전 17막(幕) 각 장면에 하나 혹은 둘의 구약성경에서 인용한 배경을 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