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東港(동항)본당
매달 13일마다 「성모의 밤」
신부님의 일과는 병자방문과 한국말 배우기
화목스런 가족적 분위기
발행일1960-07-03 [제236호, 4면]
부산 중앙성당 남쪽 언덕위의 「충무공원」(우남공원)에서 동편을 멀리 바라보면 해안(海岸)을 끼고 뻗은 산기슭에 판자(板子)집들이 많이 있는 곳을 볼 수가 있다.
일정(日政) 때 「아까사끼」(赤崎)로 널리 알려졌으며 8·15 해방후 한때는 「우암」(牛岩)이라고도 불리었으며 최근 이 지역을 통치해서 동항(東港)이라 한다.
일제시대에는 소(牛) 말(馬) 돼지 등 가축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곳이며 지금도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는 도살장이 있어 매일 수십마리의 소와 돼지들이 인간의 영양(營養)과 입맛을 돕기위해 희생되는 곳이기도 한데 현재 인구(人口) 5만을 헤아리는 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하게된 것은 6·25동란 후의 일이며 지금도 쓰라린 하루살이에 허덕이는 피난민 촌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가난한 촌에 희망의 등불이 되어주는 종탑에서 아침저녁 종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도 역시 전쟁이 나던 해에 된 일이었다.
서울 세종로성당에서 세상을 작별하신 <요왕> 이(李完成) 신부님이 현재 강당(講堂) 자리에 「바락」 한채를 이어놓고 불과 10세대에 3명내외의 교우들이 『천막성당』이라 부르게 된 것이 시초였다.
그 몇해 후 뜻하지 봇한 피난민 수용소의 큰 화재로 말미암아 아끼던 『천막성당』도 재로 변해버렸던 것을 신부님과 교우들의 노력으로 판자로 이룩한 성당이 지금의 강당건물이다.
그후 1955년 현재 동래본당 주임인 <야고버> 이(李泰俊) 신부가 본당신부로 부임한 때부터 정식본당으로 설정되었는데 날로 밀려드는 구도자들을 맞아들이기엔 너무나 협소하여 불편함을 느끼게 되어 성당을 짓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야고버> 이 신부는 사제관만 완성시켜놓고 본당 건물은 터만 닦아놓은 채 동래로 전임되고 부산교구 초대당가(經理) 신부였던 <요셉> 김(金在石) 신부가 이 본당을 겸임하여 보살펴 주시던 때인 1958년 1월 30일에 1백평의 건평에 천여만환의 공사비를 들여 착공한 것이 그해 12월에 준공을 보게되어 눈물어린 이주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약 1년이나 <요셉> 김 신부의 후임으로 작년 10월에 현재의 <안또니오 트라우넬> (河) 신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어느 지방을 가드라도 프로테스탄트의 수가 많은 것이 한국의 통례인데 여기만은 예외로 가톨릭신자가 훨씬 많다고 하며 열교인들은 힘을 못쓴다는 것.
1956년 당시 교우 5백명이었던 이 지방은 <트라우넬> 신부의 노력으로 금년에 이룩된 감만동 공소를 합하면 2천여명의 신자를 가진 으젓한 본당으로서 가톨릭 액숀은 특히 청년회가 활기를 띠우고 있으며 「레지오 마리에」운동도 성인(成人) 3개 쁘레시디움이 설치되어 신부를 도와 맹렬한 포교사업을 전개하고 있다.
매월 13일마다 「파띠마의 성모」를 특별히 공경하기 위하여 성모님께 특별한 기구를 바치는 「성모의 밤」 행사는 이 본당의 자랑거리다.
화목하기로 그야말로 한집안과 같은 본당 교우들은 지금부터 약2년전 일본에서 건너온 「마리아의 선교자 프란치스꼬회」 수녀들이 이곳에 임시나마 자리를 잡고 있을 때 본당의 많은 도움이 되었으나 금년 5월 「양정」(楊亭)동에 건립된 새 원사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교리강좌와 아동지도에 애로를 느끼고 있다고 말한다.
<안또니오 트라우넬> 신부는 지금부터 28년전 서독 지방법무관의 외아들로 태어나 「인골스타트」 에서 신학공부 하시던중 한국에서 전교하던 성베네딕트 수도회의 <에른스트 쉬베르쯔>(池=聞慶) 신부의 한국에 대한 특별 강론을 듣고 한국에 가서 전교할 것을 결심코 지원하여 약2년전 처음으로 한국땅을 밟게된 것이라고 한국에 오게된 인연을 피력.
2차대전 당시 「유고스라비아」에서 공산군에 포로가 되어 4년간이라는 긴세월을 고생하시던 중 얻은 병은 지금도 그 고통이 가시지 않고 있어 고생을 하신다는데 과거에는 축구 등 활발한 운동을 즐겻다고 하며 그 자신도 아직 젊은이로써 특히 청소년을 사랑하는 이 신부의 일과는 환자방문과 한국말 배우기라는데 지금은 제법 유창한 한국말로 매일 평균 10세대의 병자가정을 방문하시는데 이곳 주민들이 찾아갈 수 없는 곳까지 다니시며 구령과 기구 등 자선행위로 생활의 전부를 삼고있는데 자신의 몸을 너무 돌보지 않는다고 교우들은 신부님의 건강을 아끼는 안타까움의 불평을 말하고 있다.
본당 회장을 비롯한 많은 교우들의 희생적인 협조에 감사를 잊을 수 없다고 하시면서 『한국 사람은 일본과 다른나라에 비교하여 신부에게 대한 존경심이 강하다』라고 2년간 한국에 대한 인상을 말하며 한국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으며 이 땅의 흙이 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