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67) 木浦(목포) 山亭(산정)본당
62년의 역사 지녀
「古兵(고병)은 더욱더 굳세고」
셋 본당을 이미 독립시켜
발행일1961-05-21 [제279호, 3면]
「유달산」 「삼학도」 그리고 「영산강」의 여운(余韻)이 주는 서정(서淨)과는 달리 허허(虛虛)벌판 위에 외따로 섯는 듯한 이 본당은 풍랑(風浪)과 싸울데로 싸운 고깃배의 「돛」과 같다. 성당문 15「미터」 가량 앞 바위 위에 「등대」와 같이 서 있는 성모상은 목포의 시가와 항구 그리고 산과 산을 구비치며 흐르는 저 멀리 보이지 않는 수평선까지 굽어 본다. 동상에는 『평화의 모후여 우리 위해 빌으소서』라 새겨졌고… 성당 입구의 철문(鐵門)은 억센 바람을 지나치며 구멍을 뚫었다. 붉고 누른 꽃들일랑 세찬 바다바람에 견디질 못하는지 한송이도 없고 성당 구내는 엉성하다.
주보이신 「십자성가」(十字聖架)가 사진에 보는 바와 같이 성당 정면에서 비바람을 막는다. 세속악과 줄기차게 싸운 고병(古兵)의 꾸밈없는 차림이다.
이 본당은 지금으로부터 62년 전 그러니 이조말엽인 1899년에 세워졌다.
광주교구에서는 노안(老安)본당(1895년) 다음으로 제주도의 제주(濟州)와 서귀포(西歸浦)본당과 같은 해에 설립된 본당이다.
이조(李朝)의 군난을 지냈고 또 이조의 몰락, 일제(日帝)의 침략도 당하면서 자란셈이다.
중국집처럼 곤색으로 진하게 칠한 이 167평짜리 성당에도 교우는 무려 4천7백명이다. 거기에다 공소로는 섬이 두 곳 육지가 두 곳 속한다.
유달산(儒達山) 밑 목포 남단(南端)의 현경동(京洞)본당을 1953년에, 1954년에는 진도(珍島)를 또 이 본당과 경동의 중간에 1958년 현 북교(北橋)본당을 각각 설립해서 분립시켰다.
3,500평이나 되는 큰 대지에다 대성당을 지으려 시작했다가 6.25로 중단했다 한다.
본당주임이신 <그레고리오> 유(Hughes) 신부님은 『이제는 본당운영을 자급자족 할 수 있게되어 무엇보다 다행이다』고 한다. <골리아노> 석(Hickey) 신부님의 보좌를 받는 유신부님은 익숙해진 우리말로 『「레지오」 단원이 큰 활약을 한다』고 기뻐한다.
그러니 8개 「쁘레시디움」의 병력과 구장 아홉, 반장 75명은 명실공히 손발이다.
특히 유신부는 어린이 교리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교우 자녀는 누구이던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에 1년 동안 교리반에 다니고 반듯이 첫영성체를 해야 한다』고 본당 특유의 「법」과 같이 업하게 지시하고 있다.
또 한 가지 <그레고리오> 유신부는 교우 전원이 이웃에 좋은 표양을 보이고 권유하여 입교를 하게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자기 표양의 건실(健實)은 남의 입교를 권유하기 이전 스스로를 위해서도 절대 필요한 것이다.
서양사람으로는 키가 과히 크지 않은 이 유신부님에게도 딴 신부들에게 있는 고민이 있다.
첫째는 남자들 영세가 적고 미사첨례하는 수가 적고 여자만의 짝교우.
둘째는 목포에서도 빈민이 제일 많은 곳이 이곳이라는 것이다.
어·농·상(漁農商)의 영세민들이 대다수인 이 본당에 서울서 장대익신부님이나 부산의 신용조합을 시험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를 묻자 대단히 구미가 댕기시는지 유신부님은 장신부님의 주소를 묻고 새로운 작전을 꾸민다.
본당신부는 현주교님의 뜻과 같이 성당 증축보다 「추수」 위해 모든 힘을 다하고 있다. 그리고 교우들의 영혼 충실을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