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빌라의 美人傳(미인전) (31) 10자가의 요왕
발행일1961-05-21 [제279호, 4면]
<안토니오 데 에레디아> 수사는 원래 귀하게 자랐고 「완률」 생활의 기간이 30년 이상이었다.
『신부님 누구나 다 자기 고유의 길이 있어 신부님은 신부님께 알맞는 길을 따르고 계십니다. 엄격한 생활을 갈망하시는 것이 의심 없읍니다……마는 「그러나」가 있어요…』
걱정이 없을 수 없는 <데레사>는 그에게 1년 간의 엄격한 보속 기간을 주었다.
그러나 젊은 <후안데산 마티아스> 수사는 그의 첫눈에 믿어웠다. 그 수사는 첫 「미사」를 봉헌하고 나서부터 은수자의 독처생활에 대한 강력한 동경을 느꼈다는 것이었다. <후안>은 색덕(色德)이 겸비했으나 명주를 손수 짜야만 살 수 있는 어느 빈천한 처녀와 결혼한 탓으로 문중(門中)에서 쫓겨난 「양반」의 아들이었다. 그 「양반」의 조부는 <요안 2세> 왕의 시종무관이었고 그의 숙부는 「톨레도」의 종교재판관이었고 그의 친척으로 대성당의 「까논」이 셋이나 있었으면서도 그의 아버지는 직조노동을 하다가 조사(早死)했다. 그런이래 <후안>은 동기들과 함께 젊은 과부 모친의 슬하에서 어렵게 자랐다.
유력한 성직자들이 <후안>의 학식과 신덕을 높이 평가했고 그의 동료들은 그의 엄격한 극기생활을 존경했다. 그는 키가 너무도 작았으나 이마가 놀라울 만큼 넓었고 깜한 눈동자는 불이 번쩍였다. <후안>은 원시적 수유을 자기 홀로 지킨다는 것이었다. <데레사>의 직흥적(卽興的)인 성격이 다음 기회까지 참을 수 없이 「개혁」의 위대한 계획을 그 자리에서 이야기했다. <후안>은 기쁨의 흥분으로 자기 얼굴이 붉어지는 것도 몰랐다. <데레사>는 그에게도 역시 당분간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 이듬해 <데레사>는 4월11일에 새 수녀원을 「말라곤」에 창립했다. 8월15일에는 「발라돌리드」에 새 수녀원이 창립되었다. 그때 어느 귀인으로부터 집 한 채를 주마는 제의(提議)를 받고 그는 <안토니아 델 에스피리투 산토> 수녀와 <훌리안> 신부를 동반하고 궁벽한 산촌(山村)인 「두루엘로」로 현지 답사(踏査)를 떠났다.
뜨거운 8월 볕에 내리쪼이면서 종일 나귀 등에서 끄들리다가 어두어질 무렵에 「오아시스」를 만났으나 그날 밤을 쉴 데가 없었다. 맑은 시내가 곁으로 흐르는 밤(栗) 숲의 녹음이 짙었으나 한 채 밖에 없는 농막(農幕) 속에서 노래, 고함, 피리 「탐보린」이 뒤섞여 한창 떠들석하였다.
검은 「베일」을 쓰고 떠러진 헌수도복을 입은 그가 단아하고 꼿꼿한 자세로 그 집 문 앞에 나타났을 때 그 소리가 불과 몇 분 동안이나마 잠시 멎었다. 그는 그렇게 추잡한 자리와 그렇게 문란한 광경을 평생 처음으로 보았다. 그곳 큰 동내에 사는 머슴들의 풍년잔치가 그가 기부받으려는 바로 그 집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얼른 들여다 보이는 그 집 구조는 제법 큰 현관과 경사진 천정으로 달아낸 골방이 딸린 큰 방과 작은 주방으로 되어 있었다. 아무리 보아도 수도원으로 쓰일 집은 아니었다.
소음과 추잡을 피하여 인근 마을의 교회에 가서 그날 밤을 쉬면서 그는 상상했다. 그것은 『세속의 술』에 취한 농군들의 계집애들과 춤추고 있던 그 추악한 오두막집에서 「엄율 갈멜」이 재흥(再興)하는 광경이었다.
그 이튿날 아침에 그는 그곳을 포기하라는 의견을 물리치고 될 수 있는데로 빨리 「메디나 델 캄포」로 돌아왔다.
<데레사>가 도착하는 즉시 불려 온 그 한 사람의 수사와 반 사람의 수사가 「두루엘로」의 집 이야기를 듣더니 <안토니오 데 에레디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난 거기 가서 잘 생각입니다. 그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돼지우리 안에서라도 살겠소.』
<후안 데산 마티아스>는 아무 말도 않았으나 즉시 그곳으로 떠나자고 제의했다. 바로 그날 <데레사>의 딸들이 거치른 갈색 모직천을 말아 「선족 갈멜」 수사가 입을 수도복을 지었다. 그 다음날 촛불을 켜 들고 하얀 만또를 두른 수녀들이 길게 늘어서서 『베니 끄레아또르 스삐리뚜스』를 창하는 가운데 그 창립자(創立者) 도모가 <후안 데산 마티아스>에게 응접실의 살창 넘어로 새 수도복을 수여했다. <후안 데산 마티아스>는 순명과 정결과 청빈 가운데 「갈멜산 성모」회의 수율(修律)을 지킬 것을 약속하고 「완율」을 버릴 것을 엄숙히 선언했다. 그리하여 그는 <10자가의 요왕>이라는 도명(道名)으로 「두루엘로」로 떠났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안토니오 데 에레디아>가 <예수의 안토니오>라는 도명으로 그 곳에 왔다. <안토니오> 수사는 자기가 제일인자(第一人者)가 못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여자의 손에 착복했다고 <요왕>을 놀렸다. 그러나 <요왕> 수사는 <안토니오> 수사가 보다 먼저 맨발을 벗었다는 장담을 허락하고 그를 원장수사로 모셨다.
몇 달 후에 <데레사>가 「톨레도」로 가는 기회에 「두루엘로」에 들렸었다. 청명한 아침이었다. <예수의 안토니오> 원장 수사가 평수사와 마찬가지로 앞뜰을 쓸고 있었다. 허영심을 내버린 기쁨이 그의 얼굴을 더욱 밝게했다. 그는 <데레사>를 현관을 개조한 성당으로 인도했다. 골방을 영도소로 큰 방을 숙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 안이 어떻게 좁던지 사람 하나가 겨우 주저 앉을 수 있는 정도였고 땅바닥에는 마른 풀이 깔려 있었다. 지붕은 앉은 머리에 닿을 만큼 낮었다. 지붕 바로 밑에 뚫린 창으로 제대가 보였다. 베개는 돌이었다. 그들은 조과 후 1시과까지 쉬러 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 기도에 잠심했다. 어떤 때는 1시과를 바치러 성당으로 들어 갈 때 그들의 수도복 위에 눈이 쌓인 것도 몰랐다. 그들은 땅에 물이 고여도 눈이 쌓여도 맨발을 벗고 수십리 밖에까지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다. <요왕>이 가끔 너무 과도한 고행을 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란 <데레사>는 건강을 해칠 수 있는 미친보속의 유감을 물리치라고 충고했다. 그의 「모토」가 중용(中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