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련 인민은 예수를 저버렸는가?
쇠사슬에 묶였어도
발행일1960-07-10 [제237호, 3면]
이 이야기는 실화이나 보복을 피하기 위해 이름만을 가명으로 한다. 그리고 우리의 열렬한 기구를 절실히 요구함을 느끼게 한다.
<니콜라이 코지렙>과 그의 처 <갈리나> 부부는 휴일에 「모스코」의 거리를 산보하기를 즐긴다. 언제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꽃전에 들려서 가장 선명하고 신선한 활작 핀 것을 고른다. 그 남자는 모스코의 어느 공예원의 유지기사이다. 아침 8시부터 저녁 6시까지 매주간 6일 근무하고 목요일에 쉰다. 월급이 약 1100루블(110딸라). 어느모로 보나 보통직업을 가지고 보통생활을 하는 보통 「로시아」인이나 보통이 아닌데가 하나 그것은 천주의 영광을 위해 집안에 모신 성모상을 꾸미려고 목요일마다 꽃을 사는 일이다.
이 전형적인 「모스코」인은 중앙비행장으로 나가는 「고르코고」가(街)에서 5남매를 데리고 산다. 그것은 「모스코」에서 여러 마일 떨어진 쌍선국도(雙線國道)의 길가에 선 8층 내지 10층의 「아파트」건축의 최신식 주택가이다.
「아파트」마다 식당과 매점이 길가에 있어서 자족(自足)한 가정의 집단이 사는 인상을 준다.
코지렙은 8층의 큰방에 사는데 욕실과 주방과 변소가 따로 부속되었다. 방의 한구석에 「카탠」이 있어 밤에 침실을 마련한다. 이 서재는 <레닌>과 <후루시초프>의 초상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다만 출입문 뒷구석에 전형적으로 비잔틴식인 작은 성모상이 있고 그 앞에 작은 꽃병이 있다.
여러 침대, 육중한 식탁, 구식의자 등이 꽉 들어찬 이 침실 겸 서재는 서방의 수준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코지렙>에게는 대단한 살림인 것이다.
『「푸슈키나」가(街)의 뒷골목, 이전에 살던 「아파트」보다는 여기가 훨씬 좋습니다. 거기서는 방이 하나에 주방 욕실 변소가 공동이었으니까 그것도 여덟 세대가 썼지요. 이제는 사람이 실지로 사는 공간이 아무리 좁아도 사사성(私私性)이 있읍니다.』
<갈리나 코지렙>도 호텔 매점에서 6일간 신문을 팔아주고 한달에 7백루불(70따랄)를 받는다. 아침 6시반에 가서 3시반쯤에 돌아오면 저녁식사 준비에 알맞다. 큰 아들 <알렉세이>는 열아홉, 둘째가 열여섯. 딸이 둘인데 열넷과 열둘이다.
니콜라이와 <갈리나>는 「모스코」의 「성 루수」성당에 다닌다. 약 3천명의 「라틴」전례 가톨릭중에 섞여서 미사에 참례하고 성사를 받고 본당신부와 만날 수 있다. <코지렙>의 집안은 순수한 「로시아」인이나 「모스코」에 있는 가톨릭은 대부분이 「폴란드」 계통이며 현재의 본당주임 <부로니트스키> 신부도 「폴란드」인이다. 또 하나의 성당은 「사보다야 소마테츠나야」가에 있는 「희망의 성모」성당이다. 여기서는 <디온> 신부가 「미국」인을 지도한다.
모스코를 떠나서는 대부분의 가톨리이 신덕을 실천할 기회가 적다. 「레닌그라드」와 「키옙」에 가야만 미사에 더러 참례할 수 있다. 병합된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나」 「라트비아」의 「리가」 「죠르지아」의 「티폴리스」에서 몇 군데의 성당이 문을 열고 있을 따름이다. 전 「쏘련」에 1천2백개소의 가톨릭 교회가 있다고 하나 그 절반이 「리투아니아」에 있고 나머지는 「우크라이나」에 있다. 「라트비아」에 세군데 있다고 기록되었으며 「성 루수」교회에 와서 견진성사를 「리가」의 주교가 준다.
2억2천만의 「로시아」 주민들에게는 가톨릭 교회가 한 옛이야기가 되었다.
<니콜라이 고지렙>에게도 거의 옛이야기다. 「성 루수」성당에서 영세했으나 혁명중에 자라나는 동안 신앙을 잃었고 여러해동안 절망한 나머지 신앙을 겨우 도루 찾았다. <코지렙>은 무신론적 공산주의가 옳다고 주장하는 결론에 환멸을 느끼고 마음의 평화와 외곡되었을지라도 아직도 크게 중요한 종교 체험을 구하는 수천만의 중년 「로시아」인을 대표한다.
『성당과 신부님이 보편적으로 없어졌지마는 사람들이 공적(公的)으로는 천주님을 부인하면서도 마음은 점점 천주를 향하고 있읍니다. 비밀교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공적으로는 구가를 숭배하나 사적(私的)으로는 구원해주시라고 천주님께 빌고 있읍니다. 그들 전부가 무신론자라고 나무라지 마시오』 <니코라이> <갈리나>는 무신론에 대해 익숙한 지식을 가졌다. 그의 자녀들이 「성 루수」성당에서 영세했었고 열살때까지는 규칙적으로 미사참례를 하고 성사를 받았다. 그러나 「콤소몰」(공청)의 당원으로서 훈련을 받더니 하나씩 종교 의무를 버리고 이제는 자기 부모의 신앙실천을 터놓고 나무랜다.
「코리렙」는 혁명의 첫해는 잘 기억을 못하나 부친이 어느 음모사건에 몰려서 행방불명이 된 이래 모친이 식구를 먹여살리느라고 갖은 욕을 당하다가 열세살 때 세상을 떠났고 형과 함께 자활할 때까지 공립학교에 다녔다. 신앙을 버린 것이 바로 그때였다. 신부님이 없었고 성당이 없었어도 별로 거북하지 않았었고 부신론적 공산주의가 그날의 질서였다. 거기다가 어떠한 형식이라도 종교적 표현을 정부가 허용하지 않았다.
2차대전중 <니코라이 코지렙>은 여러번 전투에서 살아왔으나 형과 아우는 전사했다. 그가 처음으로 기도의 실천으로 돌아온 것은 전쟁중의 일이었다.
스탈린이 국민으로서나 군인으로서나 그 양면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반종교적 제한을 완화했지오. 그래서 많은 올토독스 군목이 내 부대를 찾아왔었는데 「라틴」전례의 신부님 한분이 어쩌다가 한번씩 오셨읍니다.』
<코지렙>은 일선에서 15년만에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꼭 한번 받고나서는 가톨릭 신부를 다시는 구경할 수 없었다고 술회했다. 전쟁을 이기고나자 정부는 또다시 종교의공개적 표명을 금했기 때문에 터놓고 교회에 다니기에는 큰 용기가 필요했다.
그가 갈리나의 소원을 뿌리치고 1940년에 세속식 결혼을 했음은 공장의 일자리를 안놓치려고 교회의 강복을 받는 모험을 감히 못했기 때문이었다. 가톨릭 신덕으로 그가 다시 돌아온 것은 1950년 전이었으며 그의 아내의 신공덕분이었다. 그의 아내는 남들의 조소와 당국의 추방을 두리지 않고 신앙생활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 아내는 자녀들의 영세를 주장했고 또 집에서 「요리문답」을 가르쳤으나 3년후에 열두살난 큰 아들이 「콤소몰」당원이 되더니 자기부모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공격했다. 그 다음의 두 아이들이 청년운동에 가입하더니 차례로 성당에 다니기를 그쳤다.
두 딸만은 부모의 본을 받으려니 했더니 큰 아이가 2년전에 미사와 성사를 포기했다. 『우리는 힘껏 싸웠으나 공산당이 이겼읍니다. 지금 열두살 난 딸이 아직 미사참례를 하고있지만 언제까지 계속될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젊은 애들이 전부가 교회에 안다닌다고는 생각마시오. 많은 부모들이 우리보다 더 자랗고 있으니까. 그리스도교가 「로시아」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천주게서 돌보실 것이니까』
8세부터 18세까지 철저한 공산교육을 감시하니 부모들만을 나무랄 수가 없다. 또 한가지 문제는 최신간의 미사경본이나 성경을 구할 수 없는 일이다. 「폴란드」어와 「리투아니아」어의 미사경본이 밀수입되나 너무도 비싸다. 가톨릭신문이 없으니 공산당선전가들이 물들인 뉴스밖에 없다. 이렇게 고립된 「모스코」의 가톨릭 사도직은 참으로 곤란하다.
공산주의 정신에 젖어버린 <알렉세이>가 십자가상과 성모상을 걷어치우라는데 그들의 마음이 쓰라렸지마는 전체적으로 보아서 절망적이 아닌 실화가 있다. 2차대전 후에 「시베리아」로 추방된 「리투아니아」인 부부가 10년동안 근근히 저축한 돈으로 공식 국내 관광단에 참가해서 「모스코」에 왔던 일이다. 「크레무린」 「미술관」 「GUM백화점」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올토독스수도원」 「볼쇼이 극장」 「괴뢰극장」 등을 참관하는 도중 그 부부가 다른 단원들의 눈을 피해서 가톨릭성당을 찾고 찾다가 마침내 「성 루수」성당을 발견했다. 10년동안 미사나 성사에 굶주렸으나 신덕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들의 관광단 참가는 구경이 아니라 「고해」 「영성체」하기가 유일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성당에 들어왔을 때 신부가 외출하고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당황했다. 이튿날 새벽에 다시 가서 고해성사를 받고 미사에 참례하고 영성체했다. 그들은 좋아서 어찌할 줄 몰랐다. 그들이 이번에 「시베리아」 황무지로 다시 돌아가면 죽는 날까지 다시는 신부 구경을 못할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영해 모시고 돌아가는 환희를 <니콜라이 코지렙>에게 통정했다.
『이 리투아니아 교구의 신덕이 내게는 강론 이상(以上)입니다. 나보다 더 불우한 사람들이 나타낸 용감성이 희생의 가능성을 내게 보여주었읍니다. 나는 생각 아니할 수 없었읍니다. 나는 행복하다고. 사실상 성당이 내 문앞에 있으니까.』
『그리스도교나 유대인에게 공개적인 박해는 없으나 정치적 경제적 관점에서 천주를 믿는 사람에게는 아무런 세력이 없읍니다. 인민에게 미칠만한 세력이 없으니까 우리 신자들이 관용을 받는 것입니다.』
코지렙의 생각으로는 현재 그리스도 신자가 어느때보다 더 많다. 인생의 길로서의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이 점점 커가기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이번 「올토독스」 사제가 그에게 한 말을 들으면 특히 20대의 청년들 가운데 사제지원의 성소가 늘어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