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의덕이 학자들과 바리서이의 의덕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두 5,20)
성신강림 이후의 교회 전례(典禮)는 성삼주일 다음주일부터 그리싀도를 소개하여 우리를 잔치에 초청하는 주인으로, 그 다음엔 길 잃은 양을 찾아 얻은 후 두 어깨에 메고 기뻐 돌아오는 착한 목자로, 지난 주일에는 교회라는 배(船)와 그물로써 영혼을 낚는 어부로, 가르쳐왔읍니다. 그러나 오늘 주일에는 우리 편에서 이러한 그리스도께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즉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신자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 서로 맺어진 공동체(共同體)입니다. 즉 우리들은 사랑 가운데 생활하는 하나의 영체로서 그 안에 한줄기의 핏줄과 신경이 통할뿐이니 하나의 기쁨과 슬품이 곧 전체의 기쁨과 슬픔이 되는 유기적 결합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교회의 생명은 조물주이신 천주와 피조물이 인간과의 사랑의 일치로 또 천주게 대한 사랑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맺어진 사랑의 일치입니다. 그렇기에 오늘 복음 첫 마디에서 우리 신자들의 덕이 율법학자나 「바리서이」의 덕보다 낮지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노라고 엄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적되는 학자와 바리서이들은 예수시대의 구약율법(舊約律法)학자로서 자기들만이 구약법에 밝아 민중을 지도할 수 있고 또 자기들만이 「모이세」법을 잘 지키는 모범자로 자처하던 자들입니다.
물론 저들이 구약법에 대한 많은 지식을 가졌고 또 법을 지킴에 있어 세목에 이르기까지 철저하였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있었으니 즉 법의 옳바른 정신입니다. 언제인가 성 바오로께서 『글자는 죽이나 정신은 살린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저들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볼 것입니다.
저들은 구약의 계명을 문자대로만 지키기에 열중하여 재(齋)도 가끔 지키고 파공도 엄히 지키며 성전에 예물도 많이 바치기는 하였으되 법 위에 있는 것은 별로 돌보지 아니하였읍니다. 다시말하자면 모든 법의 근본 이유가 천주께 대한 사랑과 사람간의 사랑에 있고 또 사랑은 모든 법의 시초요 완성인 것을 망각하였든지 혹은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사랑의 동기를 떠나서의 순기계적인 형식적 준법자, 내용이나 정신보다도 외양과 허식에 치중하며 자신의 행위를 무리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자들은 흔히 속보다도 겉만 보고 판단하기 쉬우며 또 판단의 기준이 자기에게 있어 자신의 취미, 의사, 성격, 감정 등에 맞지아니하면 나쁘고 맞으면 좋다고 그릇 판단하게 됩니다. 이들은 동시에 위선자이며 독선자일 수 밖에 없읍니다. 여기서 「바리서이적」 도덕과 참된 「그리스도교적」 도덕이 엄연히 구별되니 바리서이의 도덕의 속에는 오만, 질투, 음색, 허영, 욕심, 증오 등이 가득차있을지라도 겉만은 뻔즈레하게 재(齋), 애긍시사, 미사참례, 신공 등 각가지 신심행위에 열심을 드러내는 태도요 「그리스도교적」도덕은 겉뿐 아니고 속도 그와 마찬가지로 참된 신앙심에서 겸손과 사랑과 성실로써 이루어질 때 입니다.
오늘 서간경에 『너희는 다 일심하여 기구하며 서로 동정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인자하고 공손하며 겸손하고 악을 악으로 갚지말며 오직 축복 할지어다』 하신 「바오로」 종도의 말씀대로 실행할 때 우리의 의덕은 초월함이오 또 참된 「그리스도교적」 도덕을 담음이 될 것입니다.
金永根 神父(성 분도회원·왜관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