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間接的(간접적) 적침(赤侵) 심리적인 저항은 대의에서 감내하고
군사혁명(5.16)은 한국의 전면적인 정치변동을 가저왔다. 이제 국가재건의 실행으로 착착 그 과업을 진행중에 있다. 새 정_은 강력한 항공(沆共)을 표방하고 있을뿐 아니라 간접적인 __(__)마저 분__ __으로 용공(容共) 중립주의 세력에 철저한 금압(禁壓)을 가하고 있다.
우리는 전자유우방의 주시(注視) 아래 과감한 실로 혁명적인 현실을 처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일상생활에서 오는 사소한 마찰이나 심리적인 저항을 감내하면서 보다 큰 목표에 희생심을 발휘한다면 당면한 난국(難局)을 훌륭한 그리스도교인적인 태도로서 쉬이 극복할 수 있겠다. 공산박해를 가장 뼈저리게 받고 있는 한국 가톨릭신자들은 모든 전투적 무신론에 교회정신대로 맞서 나가는 시민생활(市民生活)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60년 社說賞(사설상) 反共(반공)테마 택한 까닭은 무엇인가?
1960년도 미국 가톨릭 신문협회 사설상(社說賞)이 발표되었다. 그 제1위는 『공산주의와 투쟁』이었다. 그 내용을 추려보면,
자유 세계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공산주의라고 전제하고 여기 가톨릭은 공동전선을 펴고 있지만 그 방법에 있어서도 반드시 동보조(同步調)는 아니라고 지적했다.
동 사설은 『반공에 있어 지성적이고 효과적인 계획을 완성해야 할 것을 더 논할 필요조차 없다』고 하고 여기 대한 충분한 대답은 1937년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디비니·레뎀또리스」(공산주의를 배격함)에 전윤곽이 실려져 있음을 상기 시켰다. 동사설의 결론은 『우리는 국내 공산주의자로 인해 부단한 방해를 받고 있다. 공산주의자에 의해 선점(先占)되고 있는 일이 너무나 많다. 나토(NATO)에 대한 냉시(冷視), 외원(外援)에 대한 적대(敵對), 조세(租稅)에 대한 불평 인종차별, 교육계에의 침투』 등이다.
그러나 그들 공산주의자들의 직접적인 도전(挑戰)보다 간접적 도전의 실례로서 반공의 탈을 쓰고 나오는데 세심의 경계를 해야 한다 했다.
반공의 탈을 쓴 민주주의의 파괴는 방금 새 정권이 내건 『간접침략 분쇄』라는 슬로간과 부합된다. 이렇게 명실공히 반공체제를 강화해야 하겠다.
■ 피를 强要한다. 주검의 전통은 종식되지 않았다.
「포란드」의 수석 주교 <비신스키> 추기경은 「나치」 점령하에 희생된 모든 성직자를 추념하는 연미사에서, 오늘 모든 신부들은 「자유」를 위해 치명을 각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세기를 통해 인류는 성직자의 붉은 피를 강요(强要)해왔다. 이런 피의 전통이 오늘 종식(終식)된 것으로 여기느냐고 반문하여 청중을 숙연케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공산체제 하에서 반발하고 있는 가톨릭의 소리인 것이다.
■ 社會主義國家 그들의 자유를 원조해 주어야 한다
「큐바」의 <카스로> 정권은 계속해서 가톨릭에 대한 박해를 가중하고 있다. 즉 모든 외국인 성직자를 국외로 추방하고 교회학교를 국유화하고 있다. 73명의 외국선교사(그 대부분은 스패인 사람임)와 339교의 교회학교를 접수했다. <카스트로> 정부가 사회주의 정권이며 앞으로 강력한 사회주의 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독제정권의 상투수단은 자유선거를 지연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유선거가 아니고 독제선거가 가능할 때까지 그들의 총선거는 연기될 것이다. 진정한 자유와 자유선거는 사회주의 정부를 선택하지 않을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카스트로>와 같은 교회와 진리를 박해하는 자를 무너뜨리는 최선의 방법은 인민의 자유를 원조하는 길밖에 없다.
■ 社會敎義時代 행동으로서 적극 영향끼쳐 주어야
「워싱톤」___ 「아메리카」 대학교수 <로난.호프만> 신부는 「라띤·아메리카」에서 교회가 사회적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곳 「리마」시의 경우, 한동안 교회와 국가는 협동해서 교육, 사회사업 면에 나섰다. 그러나 한 신부가 7천명을 곳에 따라서는, 5만명을, 상대하고 있어, 전혀 교회적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대학은 좌익적으로 기울어져 가고 있다.
이런 곳에 가톨릭의 사회교의(社會敎義)는 절실히 요구된다. 사회교의 뿐 아니다. 그와 병행하는 사회대책으로 사회와 개인을 실질적으로 구제하는 행동을 일으켜야 할 시기이라고 했다.
<호프만> 신부의 말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교회의 사회교의를 적극 내세우지 않고서는 교회적 영향을 그 사회에 던질 수 없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