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평범한 것을 완전히 하루를 성화하는 길
『백성들이 먹고 배 부른 후에 남은바 조각을 모으매 일곱바구니요 먹은자는 대략 사천명 이러라』(말구 8,8)
금주 복음에는 예수께서 당신 말씀을 듣고자 따라온 4천명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사 그들이 갖고있던 일곱개의 떡과 몇마리 물고기로써 영적을 행하사 그들을 배불리심에 대하여 말하고 있읍니다. 예수께서는 공생활(公生活) 시초에 「가나」촌 혼인 잔치에서 물을 술이되게 하는 영적을 하신 이후 태생소경의 눈을 뜨게 하시고 부마자에게서 마귀를 쫓아주시고 때로는 거센 물결도 가라앉히시며 더구나 죽은 이를 부활시키시는 등 이루헤아릴 수 없는 많은 영적을 행사힘으로써 당신이 전능하신 천주이심을 충분히 보여주셨으며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빵의 영적을 하셨다고 해서 별로 이상히 여기거나 놀라지 아니할 것입니다. 다만 얼핏 납득이 아니가는 것은 먹고 남은 조각을 다 모으게 하신 이 점입니다. 당신 뜻만으로써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전능 천주로서 빵의 영적을 얼마던지 반복하실 수 있으심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조각을 다 모으게 하셨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적은 것일지라도 소홀히 말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으로 볼 것입니다. 적은 일에 충실하여야만 큰일도 완전히 치를 수 있음은 인생의 뚜렷한 경험이 아니겠읍니까? 걸작품을 후세에 많이 남겨 놓은 「이탈리아」의 유명한 조각가 <미케란제로>는 어느날 손님으로 부터 자기이 작품태도가 사소한 일에 너무 오랜 시간과 공력을 기울이는 듯한 질문을 받았을 때 『사소한 일에 참된 정성을 들임으로써 전체가 아름다워진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적은 일에 충실하여야만 큰일도 쉽게 완성할 수 있음은 비단 이세상 사정에만 그러한 것이 아니고 영선 사정에도 매야이어서 완덕 역시 적은 일에 충실함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읍니다. 시복(諡福) 수속중에 계신 어느 수도회의 창설자 신부께 대해서 누가 그의 덕을 신통치 않게 말할 때 그 신부님을 평소에 잘 알고있는 어떤 신부는 해며아여 『그분의 덕행은 문을 열고 닫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다 합니다. 문을 열고 닫치는 것을 하루에도 몇십번 반복되는 바 지극히 평범한 행위이지만 신부께서는 이러한 사소한 일에도 완전히 하기로 힘쓰신 것입니다. 아마 소리없이 열고 닫고 또 닫되 완전히 꼭 닫았을 것이며 모르긴 하지만 그때마다 속으로 천주님을 생각하지 아니했겠는지, 인간 행위의 가치는 외적표시보다 내적 의향과 행위 태도에 달려잇으므로 일이 크고 적음을 가릴 것 없이 특수한 것이나 보통것이나 다 천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또 내가 가진 기능을 다 바루히해서 하기로 힘썼으면 이것이 곧 가치있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결과가 성공적이든 실패로 돌아갔든 남이 무어라고 평하든 이런 것에 관여할 것 없이 다만 내 행위의 참된 평가자이신 천주 앞에 옳고 착실했으면 그만 내가 할 것은 다 한 것이니 안심해도 무방합니다. 조그만한 잘못이라고 해서 함부로 범하라는 이는 오래지 않아 큰 잘못도 쉽게 범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참된 신심과 덕행은 결코 겉에 드러나는 굉장함에 있지 않고 사소한 일상 범절 예컨대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조과 바치고 조반들고 직장이나 부엌에 나가 일하고 또 고단하면 좀 쉬고 친구 만나 재미있게 이야기 하고 책보다 졸리면 다시 자리에 눕는 이러한 평범한 행위를 다 천주를 위하여 완전히 하기로 힘썼으면 그의 하루는 다 성화(聖化)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평범한 방법으로써 완덕에 나아가도록 힘써보십시다.
『미소한 일에 근실한자는 큰 일에도 근실하며 미소한 일에 불의한 자는 큰 일에도 불의하니라』 (누까 16,10)
金英根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