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서울 미아리본당
자상하신 본당신부님
외양보다도 튼튼하게 지어진 성당
순박한 교우들의 친절과 유대
발행일1960-07-17 [제238호, 4면]
돈암동(敦岩洞) 마루턱을 넘어서면 서쪽 비스듬히 경사진 언덕에 몇개의 뾰죽한 건물들이 눈에 뜨이는데 그중에도 「미아리」성당이 가장 믿음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미아리」(彌阿里)본당은 본래 혜화동(惠化洞)본당 소속이었는데 1944년 현 서울교구 부주교이신 <바오로>(新仁植) 신부께서 「미아리」에다가 5간 남짓한 기와집 한채를 작마나여 교우 불과 100여명으로 시작하였고 그후 1945년엔 고 <요셉> 이(李福求) 신부, 1946년엔 <시몬> <崔> 신부, 1947년엔 <마지아> 오(吳) 신부, 1950년에 현재 이 본당을 맡고계신 <안드레아> 박(朴一圭) 신부께서 부임하여 10년간 계시는 동안에 이런 커다란 결실을 보게 되었다.
이 「성모칠고」성당은 1957년 봄에 박 신부님 자신이 몸소 설계를 하신 것으로 기공하여 그 이듬해인 1958년 6월 9일 성당 152평 사제관 52평의 건물이 총공사비 3천2백여만환으로 준공되어 있는데 이 성당의 특징은 외모보다 건물 자체를 튼튼하게 지은 것이며 성당 안에 들어서면 무엇보다도 눈에 뜨이는 것이 한국에서 몇개 없는 자개(貝殻) 제대이다.
이 제대는 이 본당 교우 <장 데레사>씨와 <엄 요안나>씨 두 여성이 헌납한 것이 또한 이채롭다.
성당 바로 옆에는 『루르드의 성모상』이 그 인자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는데 이 성모상은 성당이 준공된 후 2개월 후인 ㅣ8월 15일 강복식을 보게 되었으며 경비 25만환이 들었다 한다.
교우 총수는 7월 현재 3천여명으로 1944년 보당으로 분리될 당시에 비하면 커다란 발전을 본 것으로서 그 이면에 본당 <안드레아> 박 신부님의 꾸준한 노력의 댓가가 엿보인다.
성당 주변을 살펴보면 새성당을 짓기 전 성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이 지금의 「성가병원」으로 1958년에 개원되었고 성당 앞에는 앞으로 「자선병원」으로 기룩될 대지 6백40평에 건평 4백20평의 3층 콩크리트의 거대한 물체가 앉게 된다. 성당 뒤로는 대지 약 1만여평에 「성가수녀원」 분원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것은 1955년에 설립되어 현재 20여명의 수녀들이 가축을 기르며 화원을 가꾸고 유치원을 경영하고 있다. 특히 「성가유치원」은 1959년에 시작하였는데 장소가 협소하여 그해 5월에 건평 70여평되는 건물을 기공하여 지난 6월 6일 그 낙성식을 보았다.
현재 원아 수는 80여명으로 그 근처 다른 유치원보다 월등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본당운영은 주로 회장들이 신부님을 보좌하여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남자회장은 12명, 여자회장은 단 한분이다. 전교와 그밖에 신부를 도와드리는데 있어 가장 활발하게 조직되어 있는 것이 「레지오 마리에」운동으로 이 본당에는 8개의 「쁘레시디움」이 있고 그 활동은 활발하며 성과 또한 훌륭하다.
이 「미아리」본당은 서울 변두리본당 가운데에도 가장 빈한한 지역에 있는 성당인데도 불구하고 다른본당에 못지않게 훌륭히 발전한 것은 오로지 <안드레아> 박 신부의 심혈을 경주하여 얻는 열성의 댓가라 할 것이다. 박 신부님은 연만하신데도 아직도 장년이 부럽지 않은 체력에 흑발이시고 교우들에게 아주 자상(仔詳)하시다.
그리고 이 본당의 특색은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성당과는 달리 순박하고 교우들의 유대가 강하며 또 서로 친절히 지내는 것인데 앞으로 발전이 양양한 성당 중의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