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68) 群山(군산)본당
햇빛 볼 각 「악숀」
留學(유학)에서 쌓은 見識(견식)으로 社會惡(사회악) 除去(제거)
제2본당 설립 진전
발행일1961-05-28 [제280호, 3면]
「품파리꾼」과 「항구」, 「마도로스」와 「술집」은 끊을 수 없는 반드시 붙어다니는 하나의 공식이다.
정부시책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이젠 전북(全北)의 단 하나인 군산항에는 기껏해야 일년에 겨우 두 차례 정도 밖에 배가 들어오지 않는다니 지금의 군산 경기는 가히 짐작된다.
그러나 여전히 흥성거리는 것은 술집이라고.
산으로 둘러 싸인 군산항은 「황해」바다와 멀고 바다바람은 군산시내에 미치지 못한다.
인구는 자꾸만 늘어 「밀물」(滿朝)이 줄었는지 늡지(沼地)에도 집이 선다.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한 미군부대가 고작해서 시민들의 의지할 것인지도 모른다.
「고기잡이」도 할 만한 곳이 없는 이곳 인구는 8만이 넘는다고 한다. 그러니 「이리」 「전주」에의 관문인 이 항구가 가장 흥성거리긴 8.15 해방 직후이겠다.
술과 여자 노동자와 빈곤에 대하여 「성모무염시태」를 주보로 삼은 군산본당은 정결과 사랑 그리고 근면을 내세우고 1931년 터전을 마련했다.
성당 문턱 위에 조각한 웅장한 「파띠마의 동굴」에 언제나 발현하고 계신 성모님은 향락과 궁핍에 허덕이는 이들을 위해 기구하라고 강조하시겠다.
초대 주임이던 <베드루> 김(金榮九) 신부님은 본당을 창설하여 1938년까지 8년간에 걸쳐 오늘의 3000 교우들이 주야로 천주를 참미하게 터전을 닦았고 지금은 7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전주교구의 함열본당에서 사목(司牧)하고 있다.
1959년 7대 본당 주임이던 <아릭수> 서(徐廷壽) 신부님이 지금의 210평 되는 석조(石造) 성당을 건축했는데 화산(華山=나바위) 본당에서 분리하여 본당이 된 이곳에 현 전주 전동(殿洞) 주임인 <분도> 강(姜允相) 신부는 본당 직영의 고아원도 설립하여 지금까지 존속한다.
3천명을 거느리는 이 큰 본당에 지난 3월29일 7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불란서」에서 귀국한 <발라바> 박(朴永圭) 신부가 4월13일자로 이곳 주임에 부임했다.
한곳의 섬을 합하여 7개소의 공소를 관하에 둔 이 본당을 맡은 <발라바> 박 신부는 첫 계획으로 시내 신창동(新昌洞)에 그곳 주임이 될 <꼬마르> 고(베르기人=사미스트 會員) 신부와 「군산 제2본당」 설립을 위해 몰두하고 있다.
지금의 제1본당이 언덕바지에 있고 시내 중심지와 거리져 있기 때문에 이 제2본당은 시내이면서 빈민들이 많은 곳으로 자리잡을 예정이다.
우선 이 제2본당은 본당설립의 초급으로 적산가옥을 수리하여 설립될 것이다. 두 분이 모두 젊으면서 같이 새살림을 차리는 기분으로 목수가 되여 보고 「미쟁이」가 되며 자재구입이니 노동력의 할당을 검토한다.
7년의 유학 그것도 모든 토대가 완전히 잡혔고 불편이 없는 곳-구라파에서- 또 가톨릭의 발상지에서 젊음의 모든 정력과 감수성 그리고 바친 평생의 성무(聖務)의 완숙(完熟)을 위한 정력으로 보고 듣고 배운 <발라바> 박 신부는 꿈과 희망 그리고 이상을 어떻게 발산할 것인지를 셈하고 있다.
귀국 부임발령과 함께 제일 먼저 박 신부는 근동(近洞)의 선배 신부님들을 찾았고 기탄 없는 질문으로 값비싼 경험과 지혜를 얻었다.
지금 이 시대는 신부가 성당에 도사리고 앉아서 그물(網)질을 못한다.
박 신부님은 수다한 구라파의 외향(外向) 활_이며 그곳 교회 존속의 핵심일 수많은 가톨릭 「악숀」을 알고 경험하고 연구해 왔다.
<박> 신임 주임신부는 첫 시험으로 이미 우리 교회가 시도(試圖)한 JOC(가톨릭노동청년) 운동과 신용조합 등을 구상하며 항구(港口)의 복음, 가난과 사랑의 천국 건설을 이룩하려 만반의 터전을 한계단 싸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