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여 편의 성공적인 작품과 세 번의 「오스카」상을 수여받은 미국 은막계의 「톱스타」 <게리 쿠퍼>씨가 화려한 일생을 마쳤다.
무성영화 시대로부터 시작하여 25불짜리 일꺼리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죽기 직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최고의 수입자이며 동시에 최고의 납세자로서 여전히 은막계의 왕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한편 금년들어서 <애롤 프린> <함프리보가드> <크라크 케이블> <타이론 파워> 등 연달아 많은 저명한 배우들이 세상을 하직하였으나 <게리 쿠퍼>만큼 전세계적으로 타격과 슬픔을 가져온 예는 없었다.
「할리우드」의 배우 처놓고 이혼의 명수 아닌 자가 없고 사생활의 「스캔달」이 많고 그것이 잦을수록 명우(名優)로서의 가치가 상승(?)한다고까지 평가되어 오다싶이 윤리적, 종교적으로 지극히 문란한 그 사회에서 몹시 화려한 무대생활을 해왔음에도 가정적으로는 아주 조용하고 평화로운 남편이며 인자한 아버지였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견지해 왔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계의 35년간, 향년 59세의 고인(故人)은 「할리우드」 배우 중의 몇 명의 가톨릭 신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열렬한 성공회(聖公會) 신자이던 그는 가톨릭으로 신앙심이 굳은 부인 <베로니카 발프>(1934년에 결혼)와 외딸 <마리아>양의 감화를 받아 드디어 1959년에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다.
모범적 가정의 모범적 가장으로서 또는 충실한 신자로서의 그의 신앙생활이나 교회에 바친 원조는 그가 죽은 후에 나타난 여러 면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정열과 활기에 차고 거칠은 음성과 키가 큰 생전의 그가 가장 친밀하게 접근한 친구 주으이 한 사람은 <다니엘 설리반> 신부였다. 그는 바로 자기의 마지막 임종을 도와주고 종부성사를 주고 장례식을 집전하였다.
보다 일찌기 1953년 여름에 그는 <베로니카> 부인과 딸 <마리아>양과 같이 선교왕 <비오> 12세께 알현했다. 이때의 교왕 접견이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하는데에 크게 역할을 했고 그 동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것이 측근자 간의 공통된 의견이다.
1940년에 「요오크 상사(上士)」로 또 1951년에 「하이눈」에서 두 번이나 「오스카」상을 받은 그는 그가 죽기 직전에 개막된 금년도 「오스카」상 수여식에서 현제까지 없었던 「오스카」 공로상을 받았다.
이렇게 화려하고 전세계의 선망과 열광적 찬사를 받아온 그였건만 그는 항상 아주 겸손하였으며 자신은 언제나 평범한 남자이며 평범한 남편이라고 자처하였다. 5월16일 검은 구름이 찌프린 흐린 날에 「버벌리 힐즈」에 있는 「굳 세퍼드」 성당에서 고인의 장례미사가 엄숙히 거행되었다.
「바티깐」 당국에서도 고인의 죽엄의 보도가 전해지자 깊은 슬픔을 자아내었다고 전하고 교황의 강복이 나려졌다고 알려졌다.
생전 가장 가까이 하던 친우 중의 한 사람 <다니엘 설리반> 신부가 집전한 연미사에는 「할리우드」의 배우들을 위시하여 수많은 고인의 「팬」과 이웃 사람들이 그의 명복을 깊이 빌었다.
인생의 최고 행복을 지닌 <게리 쿠퍼>는 누구보다도 최고의 영혼준비를 마치고 세상을 하직하였다.
『나는 모든 것이 천주의 뜻임을 잘 알고 미래를 겁내지 않는다』라고 죽기 일주일에 성명한 그의 말대로 이제 그는 천주의 뜻대로 모든 영혼 준비를 만반 갖추고 부르심을 받아 겁없이 이 세상을 마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