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오마=NC】 1933년 이래 교황청 포교성성 잔관으로서 전교사업의 총 지도자이던 <후마소니 비옹디> 추기경은 노쇠와 시력의 감퇴로 몇주간 동안 병원에 입원가료중 7월 12일 서거하였다.
이 임종의 자리에는 포교성성장관서리(署理) <아가지아니안> 추기경이 있었다.
<후마소니> 추기경은 63년간 사제생활중 43년을 대주교로 지냈다.
금년 88세인 그는 1872년 9월 4일 「로오마」에서 탄생하여 1897년 「로오마」신학교에서 신품을 받기 전에 「이타리」육군에 복무하였다.
당시 그는 이미 신학박사이었고 2년후에 법학박사가 되었다.
그의 첫 보직은 「코스메딘」의 「싼타 마리아」교회였다. 1901년에 <레오 13세> 교황의 고문관 <치아스카> 추기경의 비서가 되고 동경(卿)의 사후에 <마르띠네리> 추기경의 비서로 <비오 10세> 교황 선거의 『콘크라베』에도 참가하였다. 그는 또한 「우루바노」대학에서 라띤어를 교수하였으며 1916년에 「인도」주재 교황사절로 파견되는 동시 대주교로 승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교통곤란으로 인하여 그는 「아프리카」를 둘러 여행중 여러 전교지역을 방문하였다.
그의 「인도」주재 3년간 교세(敎勢)의 발전으로 사절관을 「세이론」의 「칸듸」로부터 「마드라스」근방의 「방가로레」로 옮겼다.
1919년 「일본」주재 초대 교황 사절로 부임할 때 <프란치스 사베리오> 성인의 유해를 모시고 갔다. 그 유해는 현재 「나가사끼」대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일본」주재중 일년간의 한국을 순찰한 일도 있다. 그후 「포교성성」서기관으로 「로오마」에 돌아갔고 1922년 12월 「미국」주재 교황사절로 파견되었다.
<비옹디> 대주교는 미국주재 기간중에 KKK 재기(再起)와 1928년 <알 스미스>의 대통령 이부보 당시 교황청의 『미국 내정간섭』이라는 해괴한 비난 등의 쓰라린 반(反)가톨릭적 사건 돌발로 인하여 지장을 받았다. 당시 「멕시코」주재 교황사절이 「멕시코」의 종교 박해로 인하여 추방 당하고 그가 그 직책을 겸임중 「멕시코」내 교회와 동국 정부 사이에 『잠정조약』을 맺는데 성공하였다.
1933년 3월에 추기경으로 임명됨과 아울러 「포교성성」의 장관서리가 되었으며 한편 「검사(檢邪)성성」과 「추기경단」 「동방전례(東方典禮)성성」 임시교회 사무성성, 연학성성 역원이기도 했다.
<후마소니 비옹디> 추기경이 전세계 전교사업의 총지도자가 되자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다.
중일(中日)전쟁의 폭발은 많은 전교지방과의 보급과 통신의 길이 두절되어 그는 운수(運輸)방법 마련에 고심하였다.
1930년대의 국제적 압력은 전교사업 기금의 분배에 지장은 받았으나 그러한 곤난한 시기에 있어서도 그는 선교사들의 용기를 북돋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그의 재직중 종전의 어느 장관보다도 많은 본방인(本邦人) 전교구역을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