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빌라의 美人傳(미인전) (32) 다시 「강신」으로
발행일1961-05-28 [제280호, 4면]
1569년 5월14일에 「톨레도」에 6월28일엔 「파스트라나」에 새 수녀원을 창립하였다.
그리고 또한 7월13일에 역시 「파스트라나」에 새 수사원(修士院)을 창립했다.
그 다음 해인 1570년에는 「미카엘 대천사」 축일에 「살라망카」에 그리고 1671년 1월25일에는 「알바 데 토르메스」에 새 수녀원을 창립했다.
그 해에 그는 「메디나 델 캄포」에서 원장으로 있다가 10월6일부로 「강신」 수녀원의 원장으로 차정되었다. 그것은 교황사절인 「도밍고」 회원 <페드로 훼르난데쓰> 신부의 독단적 명령이었다.
이 소문이 「아빌라」 사람들에게 잊었던 왕년의 말썽을 회상케 했다. 「강신」 수녀원에서는 자기들의 선거권이 박탈되었다고 노기가 등등했다.
<데레사> 자신으로 말하면 낡은 수녀원 하나를 개혁하기 보다는 오히려 새 수녀원 넷을 창립하기가 더 바람직했다. 더구나 「강신」 수녀원! 21명에게 알맞은 수율이 어떻게 1백30명의 성낸 수녀들을 침묵하게 할까? 또 어떻게 그들의 정신을 집중시킬까?
<데레사>는 여성의 성벽(性癖)을 싫어했다. 잔소리, 군소리 어리석은 「넌쎈스」 자기과시(誇示), 한담, 지꺼리기, 성 잘내기 큰 거짓부리, 작은 거짓부리, 신경과민, 과장(誇張) 등등.
「강신」 안에도 착하고 정직하여 「선족 갈멜」 수녀가 될 만한 평범한 덕을 지닌 수녀가 없을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가 섭섭한 마음으로 나온 그 속으로 다시 들어갈 일을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는 오주께 어찌하오리까 하고 빌었다.
『오 딸아! 딸아! 「강신」 수녀원의 그들이 나의 자매들인데도 내가 머뭇거리다니! 용기를 내어 네가 원장이 되기를 내가 원함을 기억하라. 그 직책이 네가 생각하는 만큼 어렵지 않다. 나의 권능이 크니 다시는 더 저항하지 마라』
취임식 날 「완율 갈멜」회의 관구장 <안헬 데 살라싸르> 신부가 그를 안내했다. 임명장의 낭독이 조소(嘲笑)를 받았다. 그들은 천주를 섬겨도 자기 멋대로 하고 싶었고 대부분은 접빈(接賓), 외출, 보석 치장을 제 마음대로 하고 싶은 자유를 잃기 싫었다. 부판구장이 격노했다.
『간단히 말해 <예수의 데레사> 도모를 그대들이 원치 않는다는 계지?』
『원치 않아요!』
만장일치의 반대 가운데 오직 <카타리나 데 카스트로> 수녀의 딴 소리가 하나 들렸다.
『우리는 원합니다. 그를 사랑합니다!』
힘찬 이 긍정이 감히 역류(逆流)해서 헤엄칠 수 없는 겁 많은 영혼들을 <데레사> 편으로 당겼다. 그들이 아직도 고함을 지르고 있는 반도(叛徒)들을 헤치고 예절에 따라 새 원장과 10자가를 앞세우고 입당(入堂)하려고 했다.
순간적으로 주춤했던 반대편의 세력이 이제 방위를 강화(强化)했다. <살라싸르> 신부가 손짓 몸짓을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양편이 서로 저주와 욕설을 주고 받고 하더니 나중에는 서로 손질이 시작되었다.
소란이 계속하는 동안 <데레사>는 <살라싸르> 신부의 노기를 풀려고 무척 애썼다.
『놀라실 것 없읍니다…… 누가 되었건 아무라도 강제하기는 극난(極難)합니다』
무장경관들이 황급히 뛰어들어 왔다.
『떼 데움』을 부르려는 수가 차츰 불어가면서 원장 도모의 발거름이 일보 일보 전진했다. 그가 마침내 영도소(靈禱所) 안으로 들어서자 모든 사람이 따라 갔다. 그는 이 사실상 전장(戰場)에서 창립때 마다 모시고 다니는 「성 요셉」상을 양 팔로 꼭 끼어 안고 모든 폭력과 고경을 연민(憐憫)으로 완전히 극복하여 이튿날 아침에 영성체에 고해가 필요 없었다.
『결국 <데레사>가 성녀였다는 사실이 가능했던가?』
제1차의 수도자 대회가 열려 27년 전에 자기가 『보잘 것 없는 작은 수녀』로서 있던 방으로 들어갔다.
<데렛사>는 자기가 이전에 앉았던 자리에 무심코 앉았다. 자신의 이 돌발적 건망증(健忘症)이 그에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당장에 온 방안에 번저 끄칠 줄 몰랐다. 그가 얼마나 자연적이며 또 얼마나 겸손한 지를 그의 적들이 승인했다. 여럿이 숙덕거렸다.
『그는 참 거룩해! 그는 사실상 원장수녀의 선거권이 있는 이 불쌍한 수녀들에게 원장의 권위로 대하려 아니했고 또 그들을 강제로 개혁하려는 생각도 없었다. 이 순간에 그는 잠간 영도소를 떠나 자수와 보석으로 장엄하게 차린 3척 나머지의 극히 아름다운 성모상을 들고 돌아왔다. 그 성상을 원장석에 모셔 세우더니 열쇳다발을 그 앞에 바치고 자기는 그 발밑에 앉았다.』
『여러분 여기 여러분의 원장수녀님이 계십니다. 인자의 모후……』
볕에 쪼인 밀랍이 녹는 것처럼 가장 굳은 심정을 녹이는 그의 태도는 진지성과 호각ㅁ과 친절에 넘쳐 있었다.
『…… 나는 여러분에게 봉사하려고 또 내 힘이 자라는 데로 만사를 즐겁게 하려고 여기 왔을 따름입니다. 오 주께서는 내가 이 일을 하는데 도아주실 겁니다…… 내가 「선족 수녀」들과 함께 생활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한 조건이 없는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생활할 것인가를 천주의 성총으로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 내 수율을 여러분은 겁 내지들 마세요. 내 소원은 우리가 다 온순하게 오 주를 섬기자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는 정치가의 성명처럼 과감(果敢)하게 울리는 자기의 한 원칙을 응용하는데 여성적인 매력을 불어 넣었다. 『정치에는 완화(緩和)가 위대한 일이다.』
그는 먼저 식량을 충분히 마련하여 외출의 원인을 없이 했다. 그 다음에 외부의 방문을 금했다. 노동은 자기가 몸수 실천했다. 다음에는 당시 「파스트라나」에 있던 <10자가의 요왕> 수사를 「강신」 수녀원의 고해신부로 초청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