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尙州(상주) 退江(퇴강)본당
순교자들의 피흘린 고장
소박한 본당신부는 선천적 『농민사제』
사람낚기에 꿀벌처럼 부지런
발행일1960-07-24 [제239호, 4면]
잠간사이 어! 어! 하는 동안에 뜰앞까지 밀려오른 물이 허허바다를 이루었다가 퇴수하기 시작하면 또 수월히 잘 빠져 나간다 하여 지명(地名)마저 『퇴강』(退江)이 된상싶다.
옛날에는 부산항구를 떠난 소금배가 구비진 낙동강을 거술러 올라 이곳까지 다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한갓 옛 이야기. 지금은 주즙(舟楫)의 편의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흰비단을 깐듯한 백사장은 한폭의 그림인데 늙은 버들 젋은 버들이 태고의 꿈에 잠겨있는 강언덕 위에 훤칠하게 세워진 성당과 사제관은 지나칠 만큼 웅대감(雄大感)을 주고 있어 사벌(沙伐)면내의 장관이라 하겠다.
『하늘에 올림받으신 모후』를 주보로 뫼시는 이 본당은 대구교구내에서 오랜 역사를 간직하는 교회이다. 1899년 함창들 한가운데 축산(築山)처럼 보이는 기슭 척동(尺洞)공소에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구득한 김종록(金鍾綠)님을 기연(起緣)으로 그는 훗날 <클레멘스>의 영명(靈名)으로 김운배(金雲培)님은 <호노리오>로 이곳의 첫 교우로 김천본당 주임 <아릭수> 신부에 의해 영세입교하여 이 두메의 <베드루>가 되어 영생의 길은 열리기 시작했다 한다.
가톨릭이 순교자의 피로써 성장되었음을 어디서나 볼 수 있거니와 이곳의 가까운 백담(白潭) 역시 예외일 수 없었던 듯 충청도에서 흘러 들어온 많은 교우들이 상주로 압송되어 신앙증거의 피를 흘리기에 과감하였음이 알려지고 있다.
20여년 김천에 딸렸던 소공 「퇴강」은 1922년 본당 승격과 함께 처음으로 <마지아> 이(李鍾필) 신부를 맞았고 그후 40년에 가까운 세월에 목자가 대(代)를 잇기 여섯번 현임인 <비안네> 최(崔榮浩) 신부는 왜관(倭館) 성베데딕또회의 방인 수선(首先) 회원이다.
그는 반백(半百)을 넘은 중노(中老)이건만 상춘(常春)의 기상과 정력과 용기를 소유한 위인이며 꿀벌 같이 부지런하다. 그는 성당경내의 채마밭 가꾸기와 가축사양을 몸소하는 것은 일과(日課) 중의 하나인 듯하다.
지구(知舊)인 기자는 농담을 던진다. 『낙동강 잉어가 씨말랐다는데』했더니 그는 얼른 받아 넘기기에 군색함이 없다. 투망(投網)에는 자신이 있는듯이 보인다. 그는 고기잡이의 어부만이 아니라 『사람을 낚는이』이다. 그가 사괴려는 사람이 장기(將棋)에 능하면 장기 바둑으로 그에게 뛰어들어 그를 이끌어 내는 포교전략을 펴고 있는 듯도 하다.
본당아래 4백여명 20개 공소에 1천백여명을 거느리는 <비안네> 신부는 극히 평민적이며 웃음은 맑다. 이 농민다운 사제의 양들은 모두가 농민이요 농토에서 뼈가 굵고 그리고 늙고 또 잠들어 간 것인데 그들이 가꾼 채소는 멀리 서울에까지 호평을 걷우고 있다.
마침 요셉네집 모심기라 하여 가봤더니 수많은 아낙네 그리고 처녀들이 가로로 늘어서 모심기에 여념이 없다. 그들은 영농에 있어서도 상부상조(相扶相助)는 자별한 것이다.
『권종가라도 부르며 심그시죠』했더니 미소 띈 순한 얼굴들이 「렌즈」에 집중된다.
『사진 한장을』 했더니 홍조띈 얼굴들은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대구서』 했더니 『우야끼나! 데레사야 네가 이렇게 이꼴로 대구로 간담』한다.
그들은 교구적인 큰 행사가 있을때 큰맘 먹고 한번 출입을 하는 것인데 「필림」에 실려가는 것은 의외라는 듯 잠간동안의 떠로은 굳은 표정이 다시 미소를 회복할 때 카메라도 함께 웃는다. <묵은 수첩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