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사)를 만든 사람] (1) 촬스·로버트·다윈
발행일1961-06-04 [제281호, 2면]
■ 생애
1809년 2월12일생 1882년 4월2일 사망
부친 <로버트 와링 다윈>은 의사이다. <다윈>은 1825년에 「에딘바라」 대학 의학부에 입학 도중 퇴학하고(27세) 「켐브릿지」 대학 신학부에 전학(28세-31세) <세즈위크> 교수를 따라 북 「웰스」에 지질학(地質學) 연구차 출발(31세) 재학 중의 친우이던 식물학 교수 <헨즈로오>의 추천으로 해군 측량선(測量船) 「비글」호에 박물학자로 승선, 남반구(브라질·페루·호주·태평양제도)를 순회하여 각지의 식물학적 관찰로 생물진화(生物進化)의 신념을 품고 귀국(36세) 「켐브릿지」와 「런던」에 거주하며 지질학과 동물학을 연구하여 「종자(種子)의 기원(起源)」문제에 관한 최초의 각서를 작성하다(37세) 영국 지질학회 간사(幹事) (38세-41세) 왕립학회 회원(39세) 39세 때 종매(從妹) <엠마 웨지우드>와 결혼, 「다운」에 은거(隱居) 그때 나이 42세였다.
■ 사상
「종자(種子)의 기원(起源)」 문제에 관한 개요(槪要)를 밝히고(44세) 그 저서를 준비(54세) 56세에 「종자의 기원(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을 집필하기 시작했다. 「마레」 군도(群島) 여행 중의 <워레스>로부터 논문이 도착하여 자연도태(自然淘汰) 학설에 있어서 일치하는 것을 알았다(58세) <라이뗄>과 <피카>의 권유로 자설(自說)의 개요를 <워레스>의 논문과 같이 「린네」 학회에서 발표, 곧이어 『종자의 기원』을 간행하여 생물진화(生物進化)의 사실을 제시하고 자연도태설을 수립했다.
진화론(進化論)은 이후 약 10년 간에 반론(反論)을 극복하여 대대적으로 보급되었으나 자신은 직접적으로 논쟁에 가담치 않고 <학스리> 등의 대변을 빌렸을 뿐이다. 계속해서 동물학, 식물학 및 인류학에 관하여 연구를 께속했고 수많은 학술적 저작을 남겼다.
도태설을 「다위니즘」이라 한다. 「다위니즘」은 과학적 가설(假設)에 그치지 않고 인간 사회에 간섭(干涉)했다. 인간사회를 한갖 생물학적 생활군(生活郡)으로 본 것이다. 즉 윤리적 「다위니즘」 사회적 「다위니즘」 정치적 「다위니즘」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생물학적 「다위니즘」과 윤리, 사회, 정치적 「다위니즘」에 대한 옳은 비판이 요구된다. 첫째 생물학적으로 「다위니즘」은 종(種)의 발생에 대한 철저한 연구가 못된다. 그것은 전혀 연역적 가설(演繹的 假設)에 불과한 것이었다. 사회적인 설명도 과연 인간사회 내부(內部)의 도태가 마치 「다위니즘」의 공식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무엇보다 사실은 이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다윈>은 교의 도태설로 「진화론」을 자극시킨 것은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