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잔치에 초대를 받고도 농장일을 좀 돌보아야 하겠다는 이유에서 또는 다섯 마리의 소를 시험해 보겠다든가 혹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이유에서 초대한 그 잔치에 참석을 못하겠다고 거절한 오늘 복음 비유의 인물들의 심사는 공짜면 양재물까지 먹으려 든다는 현대 우리들 심사로서는 좀 알아듣기 어려운 일입니다. 잔치에 참석하고 나서도 농장을 실컷 잘 돌볼 수 있을 것이고 또 다섯 마리의 소도 잘 시험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잔치에 참석하는 그동안 신부를 못 보았다고 해서 신랑에게 큰 손해가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보면 이네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였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읍니다. 그러나 한편 그들을 어리석다고 비판하는 우리의 신앙적 행위를 살펴 본다면 『오십보 소 백보』 격으로 우리의 어리석음도 그와 못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거 얼마나 이 어리석은 자들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회생하사 베풀어 주신 그 훌륭한 잔치인 미사 성체에 초대를 영세성사로 받고도 속사를 돌보기 위해 또는 성욕에 노예가 되어 거절해 왔읍니까? 복음성경에 그 어리석은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곧 우리를 들어 말씀한 바라 해도 틀림 없겠읍니다.
오늘 우리는 이 어리석은 소행을 없이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성체성사의 아름다운 잔치를 묵상해 보도록 합시다.
성체성사는 칠성사 중에 제일 큰 성사요 그리스도께서 가장 갈망하사 세우신 성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신 가장 큰 은혜는 우리가 바라듯 의식주의 해결이 아니었읍니다. 이마에 땀을 흘려야만 비로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땅에서 얻어 얼굴에 웃음을 짖는 우리 인간의 모습도 불쌍했지만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코저 오시지는 않으셨읍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에게 주시고저 하신 것은 다만 귀에 울려주는 진리의 음성과 마음을 움직여 주는 모범만도 아니었읍니다. 물론 인간이 당신의 진리를 따라 바른 길을 잡고 당신의 모범을 따라 바른 생활을 해 나아가도록 하는 인류의 유일한 스승이 되시고저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더 나아가 성 <아오스딩>께서 말씀하신대로 『지극히 지혜로우시지만 더 주실 줄 모르시고 지극히 능하시지만 더 주실 수 없으시고 지극히 부하시지만 더 주실 것이 없으신』 바로 당신 자신의 제공이었읍니다.
『세인을 살리기 위해 내가 줄 바 떡은 곧 내 살이니라』(요왕 6.52)
성체성사의 신비적 효과를 생각할 때 우리는 놀라지 아니할 수 없읍니다. 성체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와 다시 없는 일치를 얻습니다. 마치 음식물이 식사를 거치우리 혈육화(血肉化)하듯 우리는 성체를 영하므로 그리스도화 합니다.
성 <네오> 교종께서 당신 성체 강론 중 명백히 말씀해 『영성체는 우리를 그리스도로 변화 시키는 것 이외 다른 것이 아니다』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친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게 거(居)하고 나도 저에게 거하며 마치 생활하신 성부 나를 보내시며 내가 성부를 말미암아 삶같이 나를 먹는 자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왕 6.57)하셨읍니다. 우리는 성체를 통해 참되히 성 <바오로> 종도의 말씀같이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내 안에 사신다』는 참된 생활 목표에 도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면 이제 『너희는 하늘에 계신 너희 성부 완전하심같이 완전하나 자 되여라』(마두 5.68)하신 그리스도의 인간 최고생활 이념을 현실화 시킬 수 있읍니다. 성부의 반영이신 그리스도와 한 육신 한 피가 된 그는 그리스도 안에 이 이념을 실현할 수 있겠읍니다.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주고 또한 그 일치에서 성부의 완전성에 우리를 도달케 하는 이 복된 잔치에 초대를, 이에 비해 보잘 것 없는 속세적 일들과 쾌락을 위해 거절해 버리거나 또는 거절까지 아니 하드라도 영성체를 하지 아니 하고 잔치에 구경꾼 모냥 멍하니 앉았다 도망가는 불행한 교우가 되지 말도록 해야 하겠읍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게 거하고 나도 저에게 거할 것이며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왕 6.57.58) (필자=______ 주임)
盧奎彩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