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카스트로와 가톨릭 對決(대결)
共産(공산)뿔럭과 큐바關係(관계)
발행일1960-08-07 [제240호, 2면]
이곳 가톨릭평신도 단체의 대변인은 「큐바」정부에 대한 소극적 저항 투쟁이 정부가 점점 더 친공경향이 농후해지는데 대해서 극적으로 나섰다고 언명했다.
교회 당국으로부터는 아무런 성명도 없었으나 공산분자들의 박해의 희생이 된 자들을 위한 특별 미사를 올린 가톨릭 신자들에 의한 반공산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에 참가한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었으며 12명의 청년이 주로 국사범(國事犯=政治犯)들만이 투옥되는 「라 카바나」육군형무소에 수감되었다. 7월 17일과 18일 2차에 걸친 “데모”는 교회에서 미사가 끝난 직후 일어났다. 가톨릭 신자들은 반공산주의라는 스로간을 내들고 교회를 떠나 행지나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하바나」의 <보자 마스비달> 보좌주교가 전세계의 공산주의 희생자를 위하여 기도할 것을 요청하는 설교에 이어서 모든 신도들이 『큐바 지지, 쏘련 반대』라고 환호하고 소리 지름으로써 일어났다. <보자> 주교는 설교단으로 돌아와 진정하기를 요청했으며 미사가 끝난 후 신도들이 밖으로 나오자 『큐바 지지, 미국(양키) 반대』라고 외치며 몰려드는 일단의 군중과 마주쳤다. 교인들은 그들을 포위했고 그중 2명은 경찰차에 의해서 구출되었다.
군중들은 교회주위에 머물러 있으면서 『공산주의 축출하라』고 외쳤다.
「하바나」공산당 신문 「호이」지는 미사를 가르켜 「카스트로」정부의 적(敵)들에 의한 『정치적 행위』라고 불렀고 공산분자와 투쟁하는자들을 『제국주의 대행자와 노예들』이라고 혹평하였다.
그런중에도 관측자들은 가톨릭신자들과 「하바나」대학의 반공산주의 교수와 학생들이 추방되리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다.
여기에서 「카스트로」 수상은 그의 첫번째 공격의 화살을 가톨릭 신부들에게 겨누었다. 그는 세시간에 걸친 테레비 방송을 통한 연설에서 「큐바」의 「서바나」신부들을 “팟쇼당”과 “화랑헤”당이나 혹은 <후랑코> 독재정부의 지지자들이라고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또한 『선량한 기독교인』들을 근절시켜 『교회로 하여금 반혁명운동의 소굴로 만들고 있다』고 역설하였다. 특히 그는 「비라누에바」의 가토릵대학을 가장 최악의 적이라고 낙인을 찍었다. 즉 「양키」와 『반혁명세력』이라는 최대의 적중의 하나로서 이 대학은 「미국」 「아오스틴」회 신부가 설립한 것이다. 그리고 「큐바」의 7백명이 너는 신부의 대부분은 「서바나」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