西獨(서독) 가톨릭과 푸로태스탄
抗爭(항쟁)의식을 잃은 抗宗(항종)발상지 兄弟(형제)
발행일1960-08-07 [제240호, 4면]
■ 공립학교의 종교교육 영화위원회의 활동
「독일」의 푸로테스탄트는 「미국」 같은 나라와 달리 강력한 가톨릭 냄새를 풍기는 것이 이상하다. 어느나라에 비해 반가톨릭적 적개심이 적은 이유는 「루터」파가 보다 강한 가톨릭적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푸로테스탄트」(抗爭者)라는 말이 「독일」에서 「루터」파에 의해 시작된 것이나 점차 폐지되어 이제는 완전히 그 공적(公的)입장을 상실했다. 그래서 이제는 「에반찔라칼」(福音派)이라는 말로 대치되었다.
「바바리아」 알프스의 「오스트리아」국경지대의 어느 부락 촌가의 바깥 벽에는 채색 뺑끼로 성인들이 커다랗게 그려졌다. 그곳의 어느 농부를 붙들고 종교생활을 물었더니 동내주막으로 동행하면서 그는 퍽 이상히 여기는 표정을 지었다. 주막에 들어가서 굉장히 큰 십자고상이 걸린 구석에 앉아서 맥주를 불렀다. 『아이들은 「바바리아」정부가 경영하고 교우 선생들이 가르치고 주(州)에서 월급을 받는 신부가 교리시간을 맡은 주립 가톨릭학교에 다닙니다.』
『솔직하게 말하면 가정에서 공동묵주신공은 이전과는 같지 못하나 우리 농부들은 90%가 실천적 교우입니다. 그러나 본당신부가 「실천적 물질주의」라고 일컫는 경향이 지난 전쟁동안에는 도시에 비해서 훨씬 적었던 것이 이제 퍼지고 있읍니다. 성소가 줄어들어 이제 도시출신의 신부들이 농촌의 본당을 맡고 있읍니다』
외국인의 판단으로 보면 비교적 잘사는 중산계급 특별히 직장인들 사이에 신덕이 굳은 것 같았다.
『학교를 나온 큰 딸은 본당에서 조직한 청년운동을 위해 활동중입니다. 나 자신은 성가 대원이고 다른 나머지 식구들은 일반교우들과 합창합니다.』
『큰 아이가 다니는 공립학교에서도 자격있는 신부가 종교의 점수를 성적표의 첫꼭대기에 놓습니다』
우리와 같이 앉았던 신부와 함게 동내를 내려다보는 언덕 위의 본당으로 갔더니 성당뒤에 있는 게시판에 「독일가톨릭영화위원회」의 게시가 있었다.
『「독일」서는 단체가 약간 과한 것 같으나 이런 사업은 퍽 중요합니다』라고 그 신부는 웃어보이면서 설명했다.
『이 위원회가 당면하는 곤란은 지방마다 도시와 농촌, 무엇보다도 교육정도에 따라서 감상과 반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에반젤리칼칙과 밀접한 접촉이 있어야 합니다. 양편의 사상 배경에는 언제나 공통된 그리스도교 전선(前線)이라는 생각이 있읍니다.
■ 교회 옛모습과 현대 앞선 근대식 성당
「루폴딩」이라는 이 마을에서 「뮌니히」로 자동차를 몰았다. 가토릭 「독일」의 언덕, 산들, 목장을 드라이브 하는 길 옆에는 십자고상과 성모성상이 동내와 서로 교대되고 동내마다 성당의 종탑이 하늘 높이 솟아있다. 성로신공의 14처가 그 일대 올라가기도 하고 어떤데서는 미술, 신심, 학식이 한가지로 유명한 고대 수도원을 만나기도 한다. 「뮌니히」서는 우리는 다시는 더 중세기나 바로쿠의 사람이 아니며 그중에서도 가톨릭은 시대의 경향을 이끌고 가야하는 느낌을 주는 급진적으로 근대적인 새성당을 규정했다.
■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의 합작
「프랑크후르트」에서 저술가인 한 젊은 교수를 만났다. 이곳에서는 가톨릭이 소수파이나 전쟁중에 파괴된 화려한 대성당은 그들이 재건했다. 그 교수의 말이 「서독」에서는 가톨릭 지성인이 지도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전국에 33이상의 가톨릭 출판사가 있고 실천적 가톨릭이 지도적인 정기간행물을 간행하고 또는 결정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다.
『내가 가톨릭 전국대회에 참석했는데 1952년에는 「베르린」서 1954년에는 「올다」에서 작년에는 「콜론」에서 개최되었읍니다. 그때마다 프로테스탄트 형제들은 자기들의 가정을 우리들의 숙소로 개방했읍니다. 더욱더 뜻있는 것은 가톨릭과 에반젤리칼 양편의 신학자들의 연례(年例) 토론회입니다. 이것은 「루터」파의 <디벨리우스> 감독과 「파테르보른」의 <예가> 주교의 개인 주최입니다. 나는 이 시(市)의 「우누 상크타」의 회원으로서 월례(月例)회에 나갑니다. 각각 두 분의 신부님과 목사님 그리고 여덟명의 평신도들이 간부입니다.
『정치적인 합작으로 말하면 자유선거가 있는 한, 이념상으로 신앙을 적대시하는 정당이 있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교 정당을 조직하는 일 이외에는 별다른 해결책이 없읍니다. 「독일 그리스도교 민주주의 연맹」(CDU)을 지지하는 유권자의 3분지2가 가톨릭입니다. 이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이 정당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적극적 합작으로 운영되는 것이 사실은 행복된 일입니다.』
■ 종교「개혁」이래 공동사용하는 교회들
「뮌니히」서 서쪽으로 「비베라흐」를 향했다. 거기는 종교 「개혁」이래 가톨릭과 에반켈리칼이 서로 공동으로 사용해오는 교회가 있다. 그러한 교회가 전국에 1백6십이나 된다. 과거 12년동안 거의 1천3백만의 피난민이 「독일」로 들어왔다 가톨릭과 에발젤리칼이 한데 있는 지방에서 하나의 교회를 서로 서로 빌려쓰고 있다.
■ 마리아의 자매들
이단(異端)의 소용돌이를 일으킨 소위 종교개혁의 발상지며 <말틴루터>를 낳은 「다름슈타트」의 푸로테스탄트 처녀들이 2차대전후 성경을 계속적으로 심각히 연구한 덕택으로 그리스도교 일치의 재건을 위해 자기들의 생애를 봉헌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허원 없는 수도회를 설립하고 거기서 그 자매들은 묵상, 기도, 활동적 사도직 생활을 실현한다. 그들이 「마리아의 자매들」이라고 자칭함은 『푸로테스탄트와 가톨릭 형제들 사이에 찢어진 상처를 아물게 할 성총을 하느님께서 내리시도록』함이라고 <바씰라이아> 어머님은 말한다.
■ 가브리엘 천사 마리아에 하례 연극
해마다 그 자매들은 자기들의 수녀원 교회에서 『가부리엘 천사가 마리아에 하례』하는 연극을 한다. 전부 자매들 자신의 연출인 이 연극은 번번히 많은 구경군을 모은다.
■ 문화 전교로는 승리 교무금 정부가 징수
「후랑크 후르트」에서 「루르」계곡으로 가면 「앳센」이라는 새 교구의 가톨릭생활이 유선(流線)형이며 근대적 형식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앳센」의 도심지에는 강철, 유리, 콩크리트 건출들 사이에 대성당으로 승격된 중세기 성당이 있다. 노동자들이 십자가 고상 앞을 지나서 공장으로 달린다. 여기서 청년운동의 간부들을 만났더니 청년조직이 고등학교에 안가는 청년만으로 본당 단위로 조직되었다고 말한다. 이 지방의 노동자들의 교회에 대한 충성심이 「유롭」의 어느나라 보다도 강하다. 여기서는 신앙생활이 공업문명과 합치되어야 한다. 교회에 연보를 얼마나 바치느냐고 어느 노동자에게 물으니 그는 놀라는 모양이었다.
『연보라니! 정부가 우리 주급(週給)에서 몇푼씩 땝니다. 극소액입니다 아무런 손해가 없읍니다. 물론 따로 연보도 하고 「카리타스」회도 찬조합니다.』 만일 교무금을 직접으로 바치면 교회에 대한 관심이 더 강해지지 않겠느냐고 물으니 그 노동자는 기가찬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절대로 안그렇습니다. 교회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한 걸 잘 아니까 나는 아무런 불평이 없읍니다. 그래도 교회란 내가 주(株)를 갖고 있는 회사가 아닙니다.』
「콜론」에 가서 똑같은 문제를 신학자인 동시에 광범한 관리경험이 있는 어느 몽시뇰에게 걸었더니 『그 노동자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득세에서 공제(控制)하는 제도를 다시 시행하기로 정부와 동의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을 몰라서 걱정이 되었읍니다. 그러나 아무런 항의가 없었읍니다. 프로테스탄트칙에서도 없었읍니다.
그 몽시뇰은 이어서 『예술, 과학, 문학 분야에서 중세기 이래 처음으로 오늘날 우리는 문화투쟁에서 승리하고 있읍니다. 신앙이란 어린애와 같은 단순성과 겸허(謙虛)가 아니면 연구와 추리와 성숙한 사고를 통해서 보다 높은 정도로 올을 수 있읍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독일」은 어설픈지식을 가진 도시 대중의 중심입니다. 그들도 역시 불멸의 영혼을 가졌으니 역시 우리가 책임져야 합니다.』
■ 성모성상
이 수녀원의 마당 가운데 뜰에는 성모님의 성상과 <아씨지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상이 평화와 묵상의 분위기를 풍기고 대개가 가톨릭성무일도에서 취한 그들의 규칙적인 기도생활의 외적 표현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