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너희게 이르노니 한 죄인의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 즐거워 하기를 회개함이 요긴치 아니한 아흔 아홉의 의인에게 비겨 더하니라』
이 말씀은 성심께서 오늘 복음을 통해 죄인인 우리들에게 가슴 깊이 새겨주고져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녀 <말가리다>에게 발현하사 당신의 심장을 보이시며 『보라 이 마음! 아무것도 아낌 없이 사람을 사랑한 이 마음을!』하시던 그 애통한 그리스도의 모습도 그리 먼 과거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성심께 관해 다음 한 가지 점을 묵상해보도록 합시다. 즉 그리스도께서 왜 지금 늦게 이 시대에 와서 당신 성심의 사랑을 게시해 주셨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녀 <젤둘다>의 신비적 일화는 바로 이 점에 관한 정확한 답같이 생각됩니다. 성녀는 일찍 성 <요왕>종도 보다도 못지 않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창끝에 찔린 그리스도의 녹방에 머리를 기댈 수 있는 특은을 받았읍니다. 그 어느날 성녀께서 전과 같이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대 사라으이 고동을 듣고 계실 때 문득 만찬 때 그리스도의 가슴에 기대여 사랑의 고동을 듣고 천주는 사랑이시다라고 증명돼던 성 <요왕> 종도께서 거룩한 질투나 하시듯 성녀에게 나타났읍니다. 성녀는 약간의 놀랜 기색을 감추고 <요왕> 종도에게 부드러운 원성을 던졌읍니다. 『당신은 만찬석에서 이미 그리스도의 심장에서 흘러내리는 이 사랑의 소리를 들으셨거늘 왜 지금까지 그다지도 무심히 묵묵하고 계셨읍니까?』 그러나 <요왕> 종도께서는 미소를 띠우며 다음같이 답변하셨읍니다. 『이 사랑의 계시는 언젠가 인간의 사랑이 차지고 얼어갈 때 다시금 사랑의 불을 놓기 위해 보관해 두었노라』고.
이 말씀은 얼마나 지당한 말씀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읍니다. 그리스도의 오상을 생생하게 목전에 두고 매일같이 그리스도께 대한 치열한 사랑 속에서 생활하던 초대 교우들에게 확실히 성심의 소리가 필요치 않았읍니다.
그리스도의 자관을 집어 던지고 세속의 월계관을 바꾸어 쓰기 시작한 11세기부터 성심의 음성은 차차 들리기 시작해 그나마 차던 사랑이 완전히 얼어붙게 된 오늘날에 성심은 드디어 <말가리다> 성녀를 통해 당신의 참혹한 모습을 우리 눈앞에 내놓아 보이셨읍니다.
우리들의 마음은 확실히 찹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현대 우리들의 마음은 그 누가 말하듯 영하 4도(度) 이하로 되어 있읍니다. 물론 사랑을 읊은 시는 옛보다 많아졌고 사랑을 찬양하는 노래는 많아졌읍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인의 지성 작난에서 나온 것입니다. 감정적 사랑의 시 몇 구절을 성심께 봉헌하거나 또는 성심께 대한 찬미가 몇 구절을 부르고 나서 성심께 대한 사랑의 채무를 다갚은듯 시원스럽게 생각되는 우리의 양심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으며 성심 상본을 벽에 붙혀 집안을 장식하고 나서 혹은 성심 상본을 책에 꼽아놓고 나서 마치 성심의 둘 없는 사도나 된 양 교만해진 우리 마음이 이를 잘 증명해 줍니다. 성심은 우리들의 이 태도에 그 무엇을 답해 주시겠읍니까? 『누 만일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준행하라』 『내 계명을 가저 지키는 자는 나를 사랑하는 자니라』(요왕복음 14장 21,22)
성심은 확실히 술 취한 입에서 찬미를 듣고저 아니하실 것이며 허영찬 붓대에서 나온 시를 받아들고 위안을 받지 아니실 것입니다. 주일날 당신 앞에 두 무릎을 꿇고 있는 그 인간에게서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 속에 말라 붙은 소금을 가져 자녀의 영육을 기르는 그 인간에게서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고 성에 흥분되지 아니한 그 결백한 인간에게서 성심은 참된 위로를 받으시겠읍니다. 신자의 본분을 소홀히 하고 범죄생활을 하며 찬미를 부르는 자에게 성심은 말씀하시겠읍니다. 『벗아 네가 친구함으로써 인자를 잡아 주느냐』고(루가 22.48)
수계를 잘 함으로써 생활개선을 함으로써 성심을 공경하려 하지 아니하는 우리는 죄인입니다. 위선자입니다. 성심은 이 위선에서 이 범죄생활에서 벗어나 참된 성심의 사도 성심의 위로자가 되기를 기다려 맞이 않습니다.
盧奎彩 神父(경북 龜尾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