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서울 가회동
양반本據(본거) 파고든 천주학
살림 난지 겨우 11년
벌써 얻은 추수 1,500餘(여)
발행일1960-09-04 [제244호, 3면]
서울 양반(兩班)하면 누구나 가회동을 연상할 것이다.
그러니 이조(李朝) 5백년의 왕권이 여기서 요리되었고 사색당쟁(四色黨爭)과 이 나라 성쇠(盛衰)도 이곳에서 마련되었었다. 고려조(高麗朝)까지의 불교가 유교(儒敎)에 의해 말살된 것도 여기를 왕래하는 소위 양반 「유생」님들 솜씨였다.
한강 강변 「새남터」의 님께 바친 피 이슬도 이곳 양반님들의 강요가 저지른 신앙의 「푸레이드」이었던 것이다.
『천주학은 왕권을 모독하고 유교에의 대기(大忌)라』는 괴변으로 의곡(歪曲) 이용한…… 그리고 『양반이 어디 쌍놈이 하는 천주학을 감히 하다니』……
요지부동의 이곳에 천주님의 사랑이 쉽사리 용납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곳에 『진리』도 변함없는 빛의 흐림도 없이 1천5백의 양떼를 거뜬히 거느리고 있다. 기자는 이런 곳에 자리잡은 가회동의 성당을 찾아 종로2가 「민주당」 본부가 있는 인사동(仁寺洞) 골목을 쭉 올라갓다 바른 편에 「교동국민학교」가 있다.
그 바로 옆엔 옛날 「운현궁」이었던 자리에 「덕성여자대학」이 있고 줄달아 NCWC(천주교 구제회)가 있다.
거기서 쭉 1백미터(百米) 가량 올라가면 네거리가 나온다. 쭉 올라온 길에서 맞은편 길건너로 다시 올라가는데 이것이 내동골목이라는 곳이고 여기가 이조 5백년을 휘어잡던 권세가와 부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주택지로 아담한 양옥도 있고 날아갈 기와질 저택이 여기 저기 눈에 뜨인다. 필자 걸음으로 10분쯤 올라가니 「가회동천주교회」 건물이 나타났다.
신부님을 찾으니 사무실에서 손님과 담소하고 계신다.
기자가 찾아간 때가 한참 무더운 판이라 줄곧 솔수건을 얼굴에서 떼지 못하고 신부님과 「인터뷰」형식으로 대강 적어본 적이다.
원래 가회동성당은 1949년 6월 명동성당에서 분리되어 한국식 가옥 한채에 제대를 꾸며서 지금 혜화동에 계신 <그리소스도모>(莊金龜) 신부님이 첫 살림의 시초를 닦으셨다.
초대신부 <마두> 윤(尹亨重) 신부님은 1949년에서 1950년까지 계셨고 2대로는 1952년까지 <네오> 방(方有龍) 신부님이 맡으셨다. 3대로 오신 분이 <바오로> 박(朴遇哲) 신부님이신데 이 신부님이 오셔서 새로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1954년 6월에 신축공사를 완성하여 12월 3일 「성 방지거 사베리오」를 동성당의 주보로 정하고 노 주교님 집전으로 <사베리오> 성인 첨례날에 낙성식을 보았다. 그 이듬해인 1955년에는 <비오> 박(朴性春) 신부님이 부임하여 3년간 계셨고. 1957년 오신 현 <요셉> 신(新麟均) 신부님이 현재까지 동성당에서 애쓰고 있다.
이 성당의 건평은 95평이고 대지는 2백99평이다. 장소가 협소하여 교회활동에 많은 지장이 있다고 한다. 신자 총수는 1천5백명이며 예비자 수는 현재 2백명 가량 되는데 일요일에 복자회(福者會) 수녀님들이 와서 이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이 본당에서는 연간 백5식명 정도의 영세자가 나는 반면에 교우들의 이동이 항상 심하여 영세자 수보다 교적이동수가 더 많아 실제로는 교우들이 줄어들고 있는 형편이라고 한다.
이 성당의 특이한 점이라고 할까 좀 이상한 일이면서 <신>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생활이 곤란해지면 모두 변두리로 이사가기 때문에 중앙에는 교우 수가 늘지 못하고 반면에 변두리에는 교우 수가 부쩍부쩍 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고. 그 해명에 수긍되는 점이 있기도 하다.
그러니 이 나라 사회 단면을 설명하는 같기도 한데 그렇다면 이곳 교우들은 가난에로만 빠지지 치부(致富)는 못하는 것 같다. 동성당활동 상황체의 하나인 「레지오 마리에」의 성인 「쁘레시디움」이 매주 금요일에 열려 활동상황 보고, 연구 등을 하고 그 활동은 매우 활발하다고 한다. 그외에 주일학교가 네 반이 있는데 중학생반이 주로 합창을 하고 국민학교 아동들이 학년별로 3개반으로 나누어서 일요일마다 문답, 교리를 배우고 있다.
회장에는 남자 3명 여자 3명인데 총회장엔 <아오스딩>이(李一)씨이다. 이 회장들은 어느본당보다 지성인들이라고 한다.
『터가 신 이곳에 가을을 바라보며 나는 회장들과 교우의 힘을 빌려 꾸준히 「씨」를 뿌리고 있읍니다』 이것이 신부님의 포부이다.
장소가 좁아 아무활동도 할 수 없어 현재까지 보잘것이 없지만 앞으로 「스페이스」가 넓어지면 많은 활동이 기대되는 조용하고 깨끗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본당이다. 필자는 신부님의 친절한 대접을 받으며 석양이 넘으려는 무렵 동성당을 하직하고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