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서울 祭基洞(제기동)
주일학교는 전국 屈指(굴지)
여회장 많은 곳이 여기
성당 건립에 20년
발행일1960-09-11 [제245호, 3면]
성동역에서 내려 개천을 끼고 왼쪽으로 북향하여 걷다보니 언덕위에 유난히 뛰어나는 건물이 보였다.
예감이 『저것이 성당이구나』하고 짐작했다. 필자걸음으로 약10분간 걸린듯 하다.
이 성당 역사를 더듬으면 그러니까 1938년 당시 대신학교의 <요왕> 고(高一郞) 신부가 한칸방을 얻어 일요일에는 몇 안되는교우 상대로 「미사」를 드리다가 1942년 당시 혜화동본당 성(成)(Rev. Singer) 신부의 협력을 얻어 <요왕> 고 신부는 36평 되는 건물을 구입하여 제기동 첫 성당 신부가 되었다. 1942년은 우리 한국에 뜻깊은 해, 즉 한국 초대주교로 <노> 현 서울교구장이 임명되고 그 이름해 봄 주교된 후 처음으로 이 성당을 축성하였다.
1947년에 <요안> 이(李三馥)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재 성당 지을 기금을 마련하느라고 애쓰다가 1950년엔 <네오> 방(方有龍) 신부가 성당을 맡고 얼마후에 새 성당 지을 터를 구입한 후 4대로 1955년 <도마> 김(金濟根) 신부에게 물려주었다. 그 이름해 11월에 착공하여 1959년 8월 23일 낙성식을 지냈는데 <도마> 김 신부는 새 성당의 상량식을 마친 후 불행히도 1958년 9월 5일 별세하셨다.
그러니 현 본당 <시릴로> 김(金德濟) 신부는 성당공사가 진행중인때 <도마> 김 신부가 병석에 눕게되어 1958년 7월 22일 이 성당을 맡았다.
새 성당 자리가 원래는 이조(李朝)때 제사지내던 곳이어서 아직도 본건적 유교사상에 젖어있는 그곳 원주민들은 교회를 원망하고 있어 전교활동에 지장이 많다고 한다. 1년간의 예비자 수는 평균 2백명 정도이고 영세자는 8·90명이라고.
이 성당의 주보는 원래는 「천주성삼」(天主聖三)이었는데 <도마> 김(金濟根) 신부가 성당건립의 기금을 미국의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주보로 모신 성당에서 원조를 많이 받아서 현재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을 주보로 모시게 되었다. 동 성당신축에 특기할 것은 총무회장인 <방지거> 이(李榮道)씨가 물심양면의 노력과 헌신적인 감독을 하여 다대한 공헌을 세운 것이다.
활동상황을 보면 「쁘레시디움」(成年)이 1개, 남녀 고등학생 각각 하나씩이 있다. 또 「성모회」가 있는데 이는 주로 본당 제대에 필요한 모든 것을 부담하고 있고 대세를 부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학생회에는 대학생반은 주일학교와 성가대를 맡고 있으며 중고등반은 교리토론을 주로 한다. 주일학교는 국민교생이 12반이나 있는데 한반에 20명 이상 두지 않고 철저한 지도를 한다. 여름방학이 되면 매일 아침 미사와 오후 4시30분부터 6시까지 「환등」을 통한 교리와 매주일 한번씩 고해성사를 보도록 하게 한다.
그밖에 교회에 대한 협조정신을 앙양시키기 위해서 「첫영성체」는 「어린이날」에 시키고 각 수도원, 신학교, 주교관, 교황사절관들을 방문하여 종교적인 분위기에 휩싸이도록 하여 성소(聖召)에 도움이 되도록 한다.
이밖에 중학 2·3학년들의 남녀반이 하나씩 있고 고등학교는 남녀합해서 한반이다 .
성인, 청년층들이 1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자치적인 토론회를 하여 가장 활발한 양상을 엿보이고 있다.
회장단은 남자 6. 여자 12명이나 되는데 여회장 많은 것이 특징이다.
성당 근처에 「바오로 수녀원」 관할인 「성모병원」이 있는데 이 병원으로 휴양차 온 수녀들이 틈을 타서 이 본당을 도와주고 주일학교 책임지도를 한다.
앞으로 희망하는 것은 무엇보다 「주일학교」를 위한 건물이 시급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