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우리들 귀에 아름다운 선률의 여음을 남기고 고난중에서도 행복을 찾은 단란한 가족 정경을 눈앞에 아로색여주었던 「트람프」가(家) 실화를 영화화한 왕년의 명화 『보리수』라면 어린이건 노인이건 그 영화에 실려진 많은 노래와 아름다운 장면을 잊지 않고 있을 것이다.
이번 그 「트람프」가의 <마리아 트람프> 부인이(우리나라에 소개된 영화에서는 서독의 명 「스타」 <루스 로이베리크> 양이 주연) 본사 사장 서기호 <루든후 크라네빗헐> 신부에게 정성어린 선물을 보내왔다. 즉 온가족이 손수 수놓은 「제복(祭服)」일습과 국네에서 구독하기 매우 힘든 교회서적 신공책 등 약 백권을 기증해왔다.
이보다 앞서 「트람프」가의 둘째아들인 <요한네스>군이 얼마전에 「신약성서」 한권을 자기 서명으로 보낸봐도 있었다.
현재 「트람프」일가는 「나치」하의 「오스트리아」로부터 「미국」에 피난해온 후 신앙과 가정과 음악에 헌신하여 살아나오고 있다.
회색빛 머리카락으로 이미 젊음을 잃은 노인이 되어버린 <마리아 트람프> 부인은 아직도 저술과 노동과 음악지도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현재까지 부인이 저술한 서적이 다섯권이나 출판되었으며 가족적 음악을 지도하는 틈틈이 또다른 저술을 서두르고 있다 한다.
팔남매나 되는 자녀들은 이미 성장하여 대부분이 결혼하였고 그들중 5명이 현재 「뉴기니아」에서 교리선생으로 일하고 있다. 막내딸 <말띠나>는 어려서 그만 사망했다.
<마리아> 부인은 「뉴기니아」에서 전도를 위한 가족 음악회를 가진 후 「미국」에 다시 와서 「사도직 종교회」를 조직하여 많은 사람을 교육시켜 「뉴기니아」로 보내고 있다 한다.
본사 사장 <서> 신부와의 관계는 「오지리」 「쌀즈부르그」가 같은 고향이며 영화장면에서 나오는 「트람프」가의 본 저택이 「나치」로부터 종전후 다시 반환되었을 때 부인은 그 집을 「종교회」에 기부하여 신학생 기숙사로 사용했었다.
그후 「미국」에서 가족 음악회를 열어 모인 수입으로 「오지리」신학생들을 위한 「스크라쉽」을 마련하였다.
사장 <서> 신부도 지난 3년을 부인의 후원으로 신학 공부를 마치고 신부가 되었다. 이들이 처음 맞나기는 지난번 대구교구 <서> 주교께서 「오지리」에 갔을 때 같이 동행했던 사장 <서> 신부가 「인스부르그」시립 병원을 방문했을 때이다.
그때 부인은 「구라파」에서 「트람프」일가의 영화 촬영중 병으로 2개월을 동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던 중이었다.
이번 보내온 첫 선물은 앞으로 한국 교회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그때의 언약을 우선 실시한 것으로 믿어진다.
「오지리」로부터 「미국」까지 「트람프」일가와 같이 동반했던 <봐스넬> 신부는 현재 몽시뇰로 부인이 조직한 「사도직 종교회」의 지도신부로 종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