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죄인이오니 주여 나를 떠나소서』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바로 그 장소에 그물을 치라는 명을 받잡고 친 연후에 예외적으로 많은 고기를 잡은 성 <베드루>께서 겸손되이 주님 발앞에 업대여 하신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현대계에 있어서 최고도의 발전을 눈앞에 보게된 우리는 『나 없이 너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요왕·15·5)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극히 못마땅히 생각합니다. 비단 이 생각은 과학계에서만이 아닙니다. 과학계를 넘어 신앙계에까지라도 친입케 되었읍니다.
사실 우리는 많은점에 있어 『주여 주여』하고 그리스도 앞에 꿇어 비는 것 보다는 차라리 내 머리와 힘을 짜내는 것이 더 속한 효과를 갖다준다는 경험을 갖고 있읍니다. 이런 경험은 우리의 권의 있는 스승이 되어 역시 사도직에도 내 지식 내 사교성 내 힘에 중심을 놓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읍니다. 실에 있어 그렇게 사도직 생활을 하고 있읍니다. 한 영혼에게 신앙을 주기 위해 『기구한다, 혹은 보속한다』는 그것은 지난 세기의 묵고 낡은 옛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지식을 넓히고 사교성을 넓히는 것만이 가장 현명한 현대적 전교의 비결이라고 우리는 믿어 눈이 멀지 아니할 정도로 책을 뒤적거리고 대죄에 떨어지지 아니할 정도로 사교에 몸을 던지고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생각과는 달리 『너 장차 사람을 낚는 자 되리라』하사 <베드루>를 사도직의 제 일인자로 선출하실 때 오늘 복음에서 잘 보듯 한 글자의 더욱 넓고 깊은 지식을 박아 주시거나 또는 사교술을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고 당신의 힘을 의지하여 할 것만을 영적으로 가르쳐 주셨읍니다.
영세성사로 인해 그리스도의 사도직의 한 몫을 받게 되고 더욱 견진성사를 통해 그 사도직의 사명을 받게된 우리는 모든 세대를 한 손에 쥐고 계신 그리스도_이 교훈적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을 낚는 것 즉 외인에게 신앙의 은총을 받도록 해 주는 것은 언제까지나 기구를 통해 그리스도에게 의지하지 아니하면 안 됩니다.
신앙은 우리 자신이 주는 선물이 아니고 다만 천주께서 홀로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의 전달은 내 자력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 어떤 기술과 재능을 부리던 천주께서 주시지 아니시면 얻지 못하는 초성덕행으로 되어 있읍니다. 신앙이 내 것이 아니고 천주의 것이라면 천주께서 자비로히 그 신앙의 보화를 어떤 영혼에게 주시도록 손을 합장해 비는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신앙의 초자연성을 「비리버 세사레아」 지경에 가르처 주셨읍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질문하시는 스승 그리스도에게 『스승은 그리스도시요 생활하신 천주의 성자시니다』 하고 신앙 고백한 <베드루>에게 무엇이라 그리스도께서 답변 하셨읍니까? 밝은 네 지혜라고 하셨읍니까 혹은 나와 먹고 마신 사교에서 얻은 믿음이라고 하셨읍니까? 이것도 저것도 다 부인하사 다음같이 말씀하셨읍니다. 『<요안>의 아들 <시몬>(베드루)아 네가 진복자로다. 대개 혈육이 이것을 네게 가르처 주지 아니하고 오직 하늘에 계신 내 성부 가르처 주심이니라』(마두·16·17)
사람을 낚는 사도직의 사명을 영세와 견진성사로 받은 우리는 우리의 중요한 이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오늘 복음 그리스도의 이 교훈적 사실을 명심하도록 해야 하겠읍니다. 과거 사도적 중점을 너무나 자력에 두었던 우리는 오늘 복음의 성 <베드루>와 같이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는 겸손을 가져 뉘우치고 새로운 그리스도의 어부가 되도록 해야 하겠읍니다.
『대저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하리라』(요왕·15·5)
(筆者=경북 구미본당 주임)
盧圭採 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