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몇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새명을 잃으면 그 생명을 구하리라. (말구 8,35)
9월 26일은 우리 한국신자들에게 가장 기쁘고 의의 깊은 79위 순교보자 첨례날이올시다. 이날을 맞이하면 우리들의 마음은 말없이 일치하여 피비린내 풍기던 신앙의 터전, 저 새남터 백사장에로 그 마음을 돌리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리 신앙의 용사들은 마귀와 세속을 대적하여 용맹히 싸웠고 마침내 영예의 순교의 「팔마」를 획득했던 것입니다.
모태속 깊이 스며든 그들의 거룩한 선혈 칼아래 으스러진 그들의 백골~ 그 옛모습 더듬어도 이제야 찾을 길 없건만 날이 가면 갈수록 해가 바뛰면 바뀔수록 그들을 사모하는 정 더욱 간절해지며 뜻있는 이들의 마음에 신앙의 불꽃이 사루어지니 이것이 아마도 승리의 빛난 보람인가 합니다.
순교는 신앙을 위하여 다른 것이 아닌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것입니다. 천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중에 가장 귀중한 것은 새영입니다. 그러나 이와같이 귀중한 생명이지만 한번은 버려야 함이 현세인의 어쩔 수 없는 운명압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죽느냐는 죽음의 목적 여하에 따라서 그 버러지는 생명은 가치를 얻게됩니다.
세상에는 재산이나 명예나 현세쾌락을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바치는 이가 있읍니다. 이것은 그 가치를 잃은 죽음입니다.
왜냐하면 돈이나 영예는 생명보다 귀중하지 못한 때문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만 그 죽음은 가치있는 죽음이 되겠읍니까? 지금의 생명을 버리고 보다 더 이상가는 생명을 얻을 수 있다면 즉 물질적 육체적 생명에 죽고 영적이며 영원한 생명에 살 수 있다면 이 목숨은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죽음이야말로 가치있는 죽음입니다. 그러한 죽음의 방법도 있는가?
예수께서는 그런 죽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읍니다.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잃으면 그 생명을 구하리라』
에수님의 말씀입니다. 이는 천주님과 천주께 대한 신앙을 위하여 현세적 생명을 버리면 영원한 생명, 천주님을 얻어누리는 생명을 갖게된다는 뜻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의 목적을 보면 맹목적인 죽음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니 한끝 명예의 죽음이라고 여기는 것이 이 나라 임금임을 위하여 죽는다든가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하여 죽는 것 등에 불과합니다. 그 이상 가는 죽음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약 1백여년전에 이 나라에 이상한 죽음의 방법을 취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읍니다. 그 죽음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보는 가장 거룩한 죽음이어으니 위에 말한 『나를 위하여 구하리라』하신 그분 즉 천주님을 위한 죽음이었읍니다.
나라나 부모를 위한 죽음도 결국 훌륭한 죽음임에는 틀림없읍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그뿐이고 다시 살기위한 죽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시 살기위한 죽음이 있읍니다. 현세 명예나 재산을 위한 죽음 대신에 천주님을 위한 죽음이 있읍니다. 훌륭하다면 조물주이신 천주님을 위한 죽음은 얼마나 더 거룩하겠읍니까. 천주님께 대한 충성이 없이는 사람에게 대한 충효는 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거룩한 죽음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거룩하고도 가치 있는 죽음을 우리 한국사람들에게 처음으로 가르쳐준 분들이 계시니 그들이 바로 오늘 전국적으로 축하하는 79위 한국순교복자들이십니다.
그분들의 거룩한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에로 가는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그들의 뒤를 따라서 수많은 이들이 거룩한 죽음을 당했읍니다. 그들의 흘린 피는 이 나라에 뿌려진 영원한 생명의 싹들을 물주고 거름주어서 일세기후인 오늘에 이르러서는 거대한 천주님의 나라를 이룩했읍니다.
친애하는 교형여러분 여러분들은 순교자들의 후손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지신 신앙은 보통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의 조상들이 목숨을 바쳐가면서 여러분들에게 물려드린 귀중한 유물입니다. 피의 댓가로 얻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조상들의 신앙에 못지 않은 신앙을 가지셔야 하겠읍니다. 죽음을 각오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서야 합니다. 죽음을 각오한 불같은 신앙 앞에는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읍니다. 과거 자유당 정권 하에 사욕과 권세에 도취되었던 위정가들은 그 마지막 고비에 이르러서는 천주교 신자들을 탄압하여 그 직장과 사업을 걹어 그들의 신앙을 위협하는 경거망동까지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때에 그 위협에 못이겨서 자기의 신앙을 굽히고 성당에 못나오는 이들도 간혹 있었고 천주교신자임을 드러내지 못하는 이들도 가끔 있었읍니다. 이런 사람들이 순교자들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겠읍니까? 이들이 생명의 위협에까지도 무릅쓰고 피로써 신앙을 지켰고 그 신앙을 후손에게 물려준 순교자들 앞에 직장, 사업에 위협을 받았다는 것을 이유로 자기 자신을 변명할 수 있겠읍니까?
여러분들은 순교자들의 후손이라는 긍지를 가지십시오. 기회만 있으면 순교라도 할 각오를 가지십시오. 순교의 본의는 신앙을 장해하는 모든 것을 결사적으로 끊어버림에 있읍니다. 따라서 여러분들이 정의와 정도에 살기위하여 불의와 부정에 죽고 정조와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불순한 정욕과 쾌락에 죽고 구원의 진리와 확고부동한 신앙에 살기 위하여 유치한 미신이나 세속영화에 죽는다면 이는 순교의 생활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불같은 신앙을 갖고계신 여러분들 앞에는 어떤 정권의 부당한 압력쯤은 문제되지 못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교형 여러분, 지금 우리나라 모든 신자들이 이 불타는 신앙, 죽음을 각오한 신앙으로써 자기생활을 내적으로 견고히 하는 한편 평신도 사도직에 참가하여 아직도 아치있는 삶과 죽음을 모르는 우리 동포들에게 천주께 대한 신앙을 전한다면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나라는 가장 행복된 나라가 될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함으로써 여러분들은 순교선조들에게 면목을 떳떳하게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 순교선조들 앞에 정성되이 꿇어 불타는 신앙의 은혜를 구하는 마음 간절하기를 바랍니다. (끝)
李갑열 神父(金泉 黃金洞本堂 主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