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부산 靑鶴洞(청학동)
대원군때부터 정착
군난 시대 이래 80星霜(성상)
지금은 복자수녀원도
발행일1960-09-25 [제247호, 3면]
시청앞 대교동(大橋洞)에 청학(靑鶴)동 가는 「뻐스」가 손님을 기다린다.
영도(影島)섬 해안을 끼고 약 25분 가량 가면 청학동 종점 조금 못미처 바른편 쪽으로 부산항(釜山港)을 바라보면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종각이 눈에 띠운다.
부산에서는 가장 먼저 신부님이 주재한 곳이던 이 고장! 그러나 정식으로 본당이 되기까지는 가장 오랜 세월이 경과된 연후에야 이룩된 이 청학동교회.
지금으로부터 약1세기전 한국교회역사에서 가장 크고 처차한 교난(敎難)이었던 저 병인년(丙寅年)군난당시 그때 경상남도 지역일대의 포교를 담당하였던 「프랑스」인 <조> 신부는 그당시 무인도(無人島)로 되어있어 관헌의 눈을 피하기에 좋고 육지와의 거리도 멀지 않은 편이라 교우들의 집회에도 편리했으므로 현재로는 유치원 자리가 되어버린 이곳에다 초가한채를 마련하고 그당시는 동래(東萊)로 불리워진 부산은 물론 남해(南海) 통영(統營) 기장(機張) 김해(金海) 등지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다니면서 목자(牧者)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한다.
「조내기」 「밖악내기」라는 별명을 가진 불란서인 <조> 신부님은 아직 살아지지 않은 교도들의 참수(斬首)와 교수(絞首)의 공포 속에 철저한 전교사업을 하시다가 돌아가신 후 <요왕> 김신부가 1932년에 대지 75평에 건평 80평의 개와집 한채를 건립했다. 그후 <베드루> 김동언(金東彦) 신부, <요안> 서(徐鳳吉) 신부, <유리오> 한(韓) 신부, <바오로> 신(申順均) 신부, <요왕> 장(張炳龍) 신부, >비리버> 김(金基泰) 신부의 순으로 맡아도아가 지역(地域)이 넓어짐에 따라 약 5년전인 1955년 12월 신선동(神仙洞)을 분리하여 그해 1월 17일 <그레고리오> 김(金有宰) 신부가 부임한 이래 곧 새 성당을 짓기시작했는데 갖은 고난을 겪어가며 건평 백평인 현 성당을 1957년 12월에 완공시켰다.
구 교우가 많기로 유명한 이곳은 지금은 1천8백여명의 알뜰한 신자를 가지고 있으며 사도직 활동은 청년회 성모회 인애회(仁愛會) 등이 있어 타본당에 못지않게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50세를 전후한 노인들로써 구성된 「인애회」는 상가방문과 초상 등 많은 활동을 하고 있어 주민들의 찬사를 받고 있다.
매월 한번씩 모임을 가지는 이들은 50여명의 회원을 갖고 있다.
오래전부터 뿌리박은 본토백이들의 딱딱한 무신론(無神論)이 대립되기는 하나 열교인 계통은 맥을 추지 못한다고……
신병으로 고생하신다는 신부는 조용한 용단성과 교우들의 비유를 잘 맞추는 인격의 소유자로서 사리판단(事理判斷)에는 사정을 두지 않는다.
한번 한다면 해내고야마는 김 신부는 1958년 9월 26일 서울에서 순교복자회 수녀원을 옮겨오기도 했고 지금은 유치원도 개원하여 수녀님들의 조력으로 아동교육에도 철저하다.
금년 7월 17일에 착공한 70여평 강당은 지금 공사중인데 이것이 완공되면 교회행사가 있을 적마다 장소가 없어 헤매는 애로를 없애고 앞으로 부사교구에서 큰 옥내 행사를 이곳에서 하겠다는 신부의 희망어린 아량이 부산의 「쎈터」를 마련한 셈.
이외도 많은 땅을 사들여 지금은 천5백평의 터를 가지고 있는데 신부의 꿈은 무엇인지 기대를 걸어볼뿐……
「불란서」에서 들여온 종각의 종소리는 성당 앞을 오가는 선박들의 무사를 비는듯…… 바다 저 건네 그리고 한없이 울려 그 여운(餘韻)은 그치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