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實(사실)에서 보여지는 金大建(김대건)의 偉大性(위대성)
발행일1960-09-25 [제247호, 4면]
4천여년간 「아시아」 동북 한모퉁이에 철저한 쇄국주의며 은둔처사국으로 숨겨있어 근대 세계각국에 그 이름조차 알려지지 못한 배달겨레의 조재를 세계가 경악당시(驚愕膛視裡)하는 가운데 전세계에 선포한 실로 「조선의 혜성」으로서 백의 민족중 첫 성직자요 그 성직자중 유일한 순교자, 또한 유일한 복자이신 김대건(金大建) 신부님의 생애에 대해서는 한국인, 비(非)한국인 가톨릭, 비가톨릭을 막론하고 누구나가 다 그 가슴 속에 벅차오르는 한 큰 센세이숀에 사로잡힐 줄 믿는다.
지금으로부터 백20여년전 규중처녀국 조선의 대문을 박차고 멀리 저 근대사상 근대문화의 탄토지(呑吐地)였던 소위 「소서양」(小西洋) 「마가오」 「마닐라」 등지에 뛰어나가 6,7년간 서양의 모든 신사상 신문화를 함빡 흡수저작(吸收咀嚼)한 후 그 활동무대에 들어서서 4·5년간 「필리핀」,대만, 중국, 만주, 몽고, 멀리 저 노령 연해주(沿海州) 근경까지 수륙수만리를 종횡(縱橫)하고 불란서 동양함대 제독 <세실>씨의 지나어 통역관으로서 남경가조약(英淸條約)에 참관하여 기영(耆英) 등 소위 지나측 사대(四大) 최고 정권대사들과 서로 악수를 노느고 그후 특히 동양의 국제도시 상해(上海) 천지에 나아가 지나관헌은 물론 저 구미 외국인 앞에 자국 조선아(朝鮮兒)의 그 모습, 그 기백 그 정기를 모조리 소개하여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버러진 저들 고관대작들의 『사물에 대한 놀라운 관찰력, 사물을 분석하는 그 뛰어난 비판력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그 시적, 예술적 기교(技巧) 등등은 고등교육을 받은 우유럽 사람들의 명예요 존영의 대상이 되고도 남음이 있는 청년』, 『학식과 교양이 겸비한 훌륭한 대인물』 『6국말을 하는 탁워한 사교가』 『도대체 그 정체를 알 길이 없는 「구과이」』(古怪 즉 不可思議한 신비적 존재를 의미하는 중국말) 등등의 경이적 찬사를 한몸에 모으고 마침애 서울 옥중에서는 우리 정부 요인들의 『소중화의 공자』(小中華 孔子)라는 탄미를 아낌없이 받았던 것이다.
이처럼 세계를 일시 진해(震駭)하던 조선의 혜성인 이 『내성외왕』(內聖外王)의 전형적인 대인걸은 마침내 천주를 위하고 조국, 동족의 구원과 그 참다운 번영을 위하여 순량한 고양같이 조국을 위한 제물이 되어 새남터 법장에 끌려나가 태연자약 온순무쌍한 태도로 목을 내어밀어 칼을 받아 고요히 순교하는 그 장면은 너무나 숭고장엄하고 너무나 초인간적이어서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다.
기치창검한 수많은 군대가 앞서 나간 후 뒷짐지워 결박된 사형수(死刑囚)는 짚으로 깐 들것(擔架)에 앉히어 구경나온 수많은 군중의 옹위를 받으며 새남터를 향해 승전의 행열은 서서히 구비치고 있다.
형장에 이르자 좌깃대를 에워싸고 둥그렇게 진을 친 군대 속으로 인도되었을 때 『외국인과 상통한 죄로 죽인다』는 대장의 선언이 낭독되자 뒷짐지워 묶이인 김신부는 소리를 높여
『여러분! 죽는 순간에 다달은 나의 말을 여러분으 귀담아 들으시요. 내가 외국인과 상종한 것은 오직 내가 믿는 종교때문이요. 내가 위하는 천주때문이었은즉. 내가 지금 죽는 것이메 지금 내게는 영원한 생명이 곧 시작되오. 여러분도 사후에 행복자가 되고 싶거든 천주교를 믿으시요. 천주 당신을 섬기지 않는자는 영벌로 대하시기 때문이요』
이와같은 의미 심장한 설교를 마치고는 군사에게 옷벗기기를 허락하사 몸을 내어 맡기신다.
이때 군사들은 그 양귀에 각각 환속을 내리꽂고 얼굴에 물을 뿜고 회칠을 한 후 사형수를 들것에 올려 앉혀 두 놈이 그 양끝을 어깨에 메고 진중(陳中)을 세바퀴 조리 돌린후 땅에 꿀리고 머리채에 줄을 매어 좌깃대 구멍에 꿰어넘겨 저편에서 잡아당겨 머리가 바짝 처들리게 한다. 이때 김 신부는 태연자약하게 형역들을 바라보며
『내몸을 이 모양으로 다루는 것이 칼로 치기가 편리토록 하는 것이냐? 이렇게 하면 너희가 칼로 치기가 좋으냐?』
『아니요 좀 몸을 이리로 돌려주었으면 더 편리하겠소』
『자! 그럼 요렇게 해달란 말인가?』
『예 그만하면 되었소 인제는 좋소』
『그러면 어서 쳐라. 나도 죽을 각오 다했다』
이 때 열두군사 각각 환도를 들고 전쟁하는 시늉을 하면서 차례로 한번 그 목을 찍으며 지나가는중 그 여덟번째 칼에 새빨간 피로 곱게 물들린 순교자이 목은 하얀 모래 위에 사푼 내리앉는다.
아! 이 얼마나 숭고 장렬한 장면인가. 한 적은나라 국광에 대한 충을 위해 생명을 바친 저 성삼문, 박팽년 등 사륙신(死六臣)의 죽음을 장하다 한다면 천지대왕 대부모께 대한 충과 효를 겸한 충성을 위해 저처럼 성스럽게 죽는 그 장면은 무엇으로 이름지어야 마땅한 것인가.
이 성웅(聖雄)이야말로 저 굴원(屈原)에 대한 찬사와도 같이 이세상 변전무상하는 영고성쇠에 몸을 맡기기보다는 차라리 충의에 불변하였고(悃悃款款朴以忠)
백암으로써 다시 세상에 나아가 구차한 생명을 이어가기 보다는 차라리 대인(大人)과 함께 놀아 그 이름을 영세에 전코자 하였고(將遊大人以成名)
배주도생하므로써 차세에 부귀영화를 누리기 보다는 차라리 내몸이 위지에 빠질지라도 은휘없이 바른말을 막 쏟아놓았고(正言不諱以危身)
간사한 계집처럼 간교한 웃음을 지어 애교를 부리기보다는 차라리 공명정대 백절불굴로 진리를 보호선전하였고 (超然高擧以保眞)
무골충 수모(木母해파리)처럼 물러서 주물리기 보다는 차라리 염결강직 독이청쟁한 부동주(不動柱)가 되려 하였고 (康潔正直以自淸)
물위에 떠서 물결에 따라 상하(上下)하는 오리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고개를 바짝 쳐들고 앙앙 불굴하는 천리마와 같고자 하였고(昻昻若千里之駒)
대가리를 푹 숙이고 원앙소리만 뒤딿는 비루말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자갈을 꽉 앙물고 영맹히 매진하는 준마(駿馬)와 같고자 하였고(寧興騏驥亢軛)
모이에 주둥이를 쳐박고 서로 다투는 계무(鷄懋)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하늘에 높이 솟아 서로 높이날기를 시새우는 학(鶴)과 같고자(興黃鶴比翼) 하였으니
이 어른이야말로 부귀로도 능히 더럽히지 못하고 빈천으로도 능히 움지기지 못하고 위협과 형벌로도 능히 굽히지 못ㅎ할 정말 대장부였다(富貴不能淫 貧賤不能移 威武不能屈 此之謂大丈夫 孟子)
성웅 기대건은 그 몸은 비록 옥중에 가치어 있으나 그 마음 그 영혼은 장자(莊子)에 이름같이 이미 구름을 타고 해와 달에 말을 달리어 사해(四海)밖을 벗어나 천국에 가 놀고 있었으니(樂雲氣, 騎日月, 而遊乎四海之外) 대택이 끓어 올라도 능히 데히게 하지 못하고 하한이 얼어붙어도 능히 차게 하지 못하고 벼락이 산을 때려 두조각 내고 태풍이 바다를 뒤집어 엎어도 능히 놀래게 하지 못할 정작 지인(至人)(Superlative-vir)이었으니 (大澤焚而不能熱 河漢호而不能寒, 疾雷破山 風振海而不能驚) 죽고 삶도 그 몸에는 아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려든 어찌 하물며 이해와 안일이 그를 움직일 수 있었으랴
오! 올라운 대장부 오! 참다운 지인(至人) 오! 숭고무비한 대성웅
김신부의 이 탁월한 위대성(偉大性)은 그때 그를 사형에 처하던 정부자체의 태도에서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증거는 모두 8개 항목에 나누어 말할 수 있지마는 여긴 단지 그 골자만을 따서 열거하기로 한다면
(1) 사형전 불과 20일전에 김신부 옥중에서 고(高) 주교께 하신 편지에 『저들은 지금 나를 무슨 큰 학자 한 훌륭한 대인물로 간주합니다. 오! 가련한 족속들!』이라 한 신부 자신의 증언
(2) 그시 조선에 잠복하여 있으면서 김신부의 체포, 신문, 처형 등의 일체 사실을 일일이 탐문 조사한 고주교의 서한에 『김신부는 옥중에 가처있는 동안 좌우포장은 물론, 많은 고관 제상들의 뜨거운 동정과 두터운 애정을 한몸에 모았으므로 저들이 국왕에게 저를 살리자고 간청하며 김신부 옥중에서 친히 그린 만국지도 한장을 올리매 국왕이 이를 받고 심히 만족히 여겨 저들의 소청을 마악 들어 주려하는 순간에 마침 불란서 제독 <세실>씨의 궤서(潰書=이건 외연도 元山 촌에서 궤에 넣어보냈기 때문에 궤서라 했음)를 받게되므로 배교치 않는자들에게 한해서 사형명령이 내렸으니 이 궤서가 김신부 처형의 전적 계기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 촉진에 박차를 가한 것임은 틀림없다』라 한 증언 등은 고사하고라도
(3) 김신부 친히 옥중에서 귀화시켜 영세준 임군집 <요셉>(林君集, 致白이라고도 함)에게 대한 포상의 말중 『네가 김신부와 가치 죽겠다고! 아니다 김신부는 죽이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도리어 나라에서 그 양반은 높은 직함과 큰 벼슬까지 주기로 했다. 그러니 너는 네 혼자라도 죽겠단 말이냐』라 한 증언(이것은 한갖 꾀이고 달래는 말이라고만 볼 수 없다)
(4) 영의정 권돈인의 『김대건 처형에 대하여는 과연 지금 외간(外間, 이것은 항간이 아닌 외간으로서 돈인 등을 제외한 많은 다른 대신들, 그중에도 특히 국왕까지를 포함한 외간)에선 두갈래 의견이 서로 대립되고 있사와 그중 한갈래는 「사형을 집행함은 조만(早晩)이 없는 것인즉 앞날을 기두려 천천히 하는 것이 늦지 않다」하는 의견입니다』(이는 분명 김신부 처형을 반대하여 질질 끌다가 결국 어떤 기회에 석방하려는 편의 주장)라 한 증언.
(5) 김신부의 처형을 끝까지 결정짓지 못하고 동문서답(東問西答)으로 미루어가는 헌종왕 자신의 그 우유부단(優柔不斷)적 태도
(6) 이런 경우 과거의 형예(形例, 비컨테 柳항검, 黃사영)에 비추어 반드시 대역무도죄로 옭아 추국후 육시(戮屍)형을 가할 것이어늘 추국도 하지 않고 단지 그냥 군문효수로 언도를 내리고만 사실(아래 곧 봄바와 같이 효시(梟示)마저 집행치 안했음)
(7) 김신부의 처형결정과 함께 동일동서에 좌우포장을 그직무태만죄로 파직한 사실(포장들이 이번 김신부 사건에 도무지 힘쓰지 않고 무슨 때만을 기두려 천연세월하면서 정부 방침에 협조하지 않했다는 죄목)
(8) 군문효수의 참형을 받은 국사 범인 김대건의 시체를 효시하여 민중을 놀래게 하기는 커녕 사형을 집행할 어영청대장의 특별 명령으로 그 시체를 곱게 거두어 깨끗한 자리에 싸 조심스리 묻어준 사실 등등으로 미루어보아 그때 일부 정부 요인들과 좌우포장뿐 아니라 국왕자신까지도 김신부의 그 놀랍고 훌륭한 인적, 그 풍부한 학식, 그 성스러운 덕망, 그 경탄할 웅변, 그 엄숙한 기품 등에 놀리고 홀리어 그의 생명을 아끼었던 심정을 뚜렷이 엿볼 수 있는 것이고 따라서 그때라도 김신부 배교한다는 단 한마디 말만 입밖에 내었더라면 결코 참형을 받지 않했을 것도 확실무의하다. 오! 충고장렬한 순교자!
그러기에 매년 우리가 즐거이 지내는 9월 28일 79위 복자 첨례에 보는 성무일도책에 『김신부 이처럼 형관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그의 덕망, 그의 웅변에 놀랜 관원들이 “배교한다”는 단 한가지 조건아래 무죄방송하겠다 꾀였으나 이 불요불굴의 그리스도용사는 이따위 어리석고 미친 조건을 일축해 버리고 혼연히 칼 아래 목을 드리밀어 순교하였다』라 찬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