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멜修女院(수녀원) 起工式(기공식)에 際(제)하여
안지랑 洞府(동부)의 黎明(여명)
발행일1960-09-25 [제247호, 4면]
나는 매일아침 일찍암치 「앞산」 기슭으로 산책(散策)을 나간다. 내가 아침산책을 시작한지도 벌써 7년이 되었다.
내가 살고있는 집이 남부지대(地帶)에 있는 것도 한 이유가 되지마는 그보다도 내가 이 앞산을 둘러봄으로서 가슴에 부드러운 위안을 받고 흐뭇한 감격에 잠기게 되는 때문이다.
새벽 회색 「베일」을 벗어버리는 앞산의 위용성자(偉容聖姿)를 가만히 지켜보는 내 눈에는 금방 거기서 어떠한 철학이 터져나올 것만 같아서 환희의 정열을 내뿜곤 한다.
영산도장(靈山道場)을 구태여 따로 어디가서 구할 것이 있겠는가. 저멀리 서쪽으로 낙동강(洛東江) 구비치는 물은 스스로 도취하여 무랑(無娘)의 옷자락인양 청산(靑山)이랑 백사장(白沙場)을 감도라가고 여기 이 「안지랑」의 아늑한 골짝이는 홀로 묵념하여 성자의 품속인양 암석(岩石)이랑 초목을 포옹하였다.
여기 이 「안지랑」 동부(洞府)에 도란도란 흐르는 물소리가 일초일각도 끊임없이 법계연생 원융무애 성상회융(法界緣生 圓融無애 性相會融)의 진리를 말하고 있는 무휴법회(無休法會)가 아니고 무엇이냐. 법장(法藏)의 이십권탐현기(二十券探玄記)도 여기 자연으로 굴려있는 바윗돌 한구석에 절로 일이났다가 절로 꺼저버리는 물벽금속에 자세히도 적혀있으며 증관(澄觀)의 구권현담(九卷玄談)도 여기 이 풀 끝에 맺혀 피어났다가 떨어지는 마른 꽃잎에 역역히도 보이지 않느냐.
자행화타(自行化他)의 대자연물(物) 앞에 몸과 마음을 고스란히 맡기고 만유무애(萬有無애)의 경지를 순간이나마 맛보고저 함이 나의 최대 희원(希願)이요 최대 행복인 것이다. 만행(萬行)의 근본의지(根本依支)인 화엄삼매(華嚴三昧)에 모든 유정무정이 다함께 안식의 최상은전(恩典)을 얻을 수 있다면 이 조양(朝陽) 아래 지순지미(至醇至美)한 만유의 본체생명이 빛나는 그 면모(面貌)를 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하길래 예전에도 이산둘레에 대소사찰(大小寺刹)이 있었던 것이며 지금도 안일암 · 은적암 · 임휴사 · 운흥사(安日庵, 隱跡庵ㅡ, 林休寺, 運興寺) 같은 절은 다 고찰(古刹)에 속하는 것으로 더러는 『고전월응조 · 파창풍역비(古殿月應吊, 破窓風亦悲)『라는 저 청허(淸虛)가 읊조린 그대로 퇴창파벽(頹窓破璧) 일 망정 아직 남아있고 근년에 새로 생긴 암자(庵子)까지를 산(算) 하면 무려 수십은 불하(不下)하다고 하니 이것만 보더라도 이산이 영산(靈山)이었던 이산중에 말세승(末世僧)을 들이기보다 정결 · 청빈 · 순명(貞潔·淸貧·順命)의 삼덕(三德)을 엄수(嚴守)함으로 속세를 해탈(解脫)하려는 수녀원을 들이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일이냐. 얼마나 늣겨운 일이냐. 앞으로 이 산이 대구(大邱)의 「갈멜」로서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를 희원(希願)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