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 焦点(초점)] 운전수 司牧(사목)
발행일1960-10-02 [제248호, 1면]
◇…… 금십자가를 가슴에 드리우고 홍띠를 띤채 때로는 수실감투까지 스시고 「핸들」을 꽉잡고 「찦」차를 달리는 운전수 주교의 이상한 모습. 그것은 「스피드」로 약진하는 「광주」교구를 멋지게 운전하는 「심볼」이다. 이제 북진중인 「레지오 마리에」 의 군기를 이나라 남단에 처음으로 세운 것이 <헨리> 주교님이시다.
◇…… 영광의 순교자--<부레닌> 교구장의 후계자인 그는 항종(沆宗) 태생이었으나 단순히 축구열 때문에 가톨릭 학교로 전학했던 것이 귀정(歸正)의 계기. 주교님까지도 처음에는 가톨릭을 「마리아교」로 알으셨더라고! 어려서부터 기계노리개를 즐겼던 그의 손길에는 어떤 고장의 차라도 떼를 몼슨다. 고장난 영혼도 역시 그렇겠지!
◇…… 그는 1933년에 이 나라에 처음으로 파견된 10명의 「골롬반」 선구자들의 한분이다. 그의 교구에서 제일 오래된 「나주군」의 촌구석 「계양」본당 보좌직이 선교활동의 첫거름. 그 마음을 당신 고향이라고 자랑하신다.
◇…… 2차대전 때는 감금생활 끝에 추방되어 「미국」으로 귀국 소령 군복으로 「유럽」 전선에 종군. 「노르만디」 상륙에도 참가. 은성훈장을 타셨다.
◇…… 해방후 교구로 복귀. 6·25 통에 <부레난< 교구장과 두분의 동료를 잃으셨다! 나머지 신부님들을 이 본당 저 본당에서 부랴부랴 구출하여 바로 바싹 뒤쫓는 공산군의 마수를 빠져나시던 재빠른 기도성 그것은 바로 「럭비」경기였다. 수복후에 교구장.
◇…… 1957년에 주교위에 오르셨다. 대규모의 병원과 학교사업. 본격적인 어업 원조와 농사지도 눈부신 발전은 언제나 주교님이 친히 「핸들」을 잡으시고 몸소 나서시는데서 시작된다. 남은 큰 야심은 대신학교! 이것은 전국적인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