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빌라의 美人傳(미인전) (35) 산험(山險)
발행일1961-06-18 [제283호, 4면]
<데레사>는 지방수녀원의 순시차 「알바 데 토르메스」로 파견되었다가 「아빌라」로 다시 불려온 지 얼마 안 되어 「살라망카」로 떠났다. 어느 때나 <훌리안> 신부가 동반한다는 소문이 「아빌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데레사>는 크게 웃었다.
1573년에 그는 「완덕의 길」의 초본을 교정했고 「창립기」(創立記)를 쓰기 시작했다. 1574년 3월19일에 「세고비아」에 수녀원을 창립했다. 1575년 2월 그는 「베아스」로 떠났다.
각도(刻刀)로 아로 새긴듯이 찬(寒) 빛으로 날카로운 윤곽을 이룬 회청(灰靑)색 평원을 건너 「모레나」 산맥의 비탈길을 나차(_車)들이 삐그닥거리면서 붙어 올라가고 있었다. 바퀴가 한 번씩 굴을 때마다 길가에서 허물어지는 돌이 바위에 부딪쳐 툭툭 튀어올라 허공으로 굴러 떨어지다가 심연(深淵)을 쾅쾅 울렸다. 그럴때마다 수탯속 여인들의 가슴은 내려앉았다.
며칠을 가도 급경사를 오르내리는 갈짓자(之字) 길은 끝이 없었다. 노새들은 점점 맥이 빠져 걸음이 늘어지고 갈수록 비틀거렸다. 나부(나夫)들의 짐승을 재촉하여 부르짖는 소리는 마치 허파가 없는 것 같았다. <데레사>가 수래를 덮은 판자틈으로 머뭇거리는 나부들의 얼굴에 나타난 근심을 엿보았다. 순식간에 그들은 넓고 육중한 자기들의 수레에는 당치도 않을 경사진 소로(小路)에 길이 막혀 버렸다. 그 길은 겨우 염소나 지나갈 수 있을 것이다. 위험을 알아차린 그는 풍랑을 만난 선장과 같이 수녀들에게 명령했다.
『저 사람들이 어디를 가고 있는지 이제는 더 모르고 있다. 자매들아, 우리 몸을 기구에 맡기자. 오 주께와 <요셉> 성인에게 길을 인도해 달라고 청하자!』
그순간 바로 그 계곡 맨 밑바닥에서 늙은 목부(牧夫)의 소리가 멀리 들려왔다.
『멈추소-오-오! 멈추소-오-오! 낭떠러지다-아-아! 더 가면 떨어진다-아-아!』
돌이 글키는 나막신 바닥 소리, 고삐를 사정 없이 잡아다리며 지르는 고함소리, 굴래와 안장의 덩그렁거리는 소리, 차축(車軸)의 삐걱 거리는 소리, 바퀴들의 어긋난 소리, 이 가운데
『멈춰라-아-아! 조심해라-아-아!』라고 외치는 소리가 온 산에 메아리치자 문득 수래들이 정지했다.
사람들과 짐승들 가운데 당황한 기색이 잠시 술렁대다가 제각기 의문과 긍정의 왁작지껄한 혼란이 일어났다. 그들은 확실히 「모레나」 산중에서 길을 잃은 것이었다. 그들은 사실상 심연 속으로 미끄러 떨어지고 있었다. 버러진 바위틈으로 올라온 소리가 그들을 구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들이 현상태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길을 어떻게 다시 찾을 것인가? 그들은 입에다 손을 나발모양으로 모우고 절벽 밑으로 외쳤다.
『어디로 갈까요-오-오?』
깊은 밑바닥에서 대답이 올라왔다.
『그대로 뒷걸음질 치소. 그러면 위험이 없오. 백 바퀴만 돌리면 길이 나옵니다-아-아』
그 소리가 침묵 가운데 공중으로 떠올라 극히 맑은 거울의 반사처럼 메아리쳐 되돌아왔다. 길을 살피러 갔던 종이 돌아와서 지적된 그곳에 오른 길이 있다고 보고했다. 돌덩어리 하나 때문에 그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일변 그 돌을 치우면서 자기들의 구조자(救助者)를 찾으려고 힘껏 심연을 향하여 고함을 지르고 그 중 한 사람이 그 밑으로 기어 내려갔으나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 목부가 어디로 숨어 버렸나? 가장 작은 돌 하나라도 보일 만큼 공기가 맑았고 텅 빈 산중에 광선이 두루 비치어 아무데도 숨을 곳이 없었다.
<데레사>의 얼굴이 눈물과 혼란 가운데 사랑으로 빛났다.
『저 사람들이 더 찾으려는 걸 이제 그만 두래라. 아무도 없을 터이니까. 우리가 들은 그 소리가 우리 기도에 대한 <성 요셉> 아버지의 응답이었다는 걸 저 사람들에게 일러줄 수 있다』
그들은 산길을 하루 더 가야 했으나 그 후로는 만사가 수월했고 짐승들도 나부들이 오히려 불평을 할 만큼 빨리 움직였다. 나부들이
『날라가는 노새를 몰기란 참 힘든 일일세』라고 서로 돌아보면서 말했다.
「가달키빌」강의 언덕에 이르러 수녀들은 강을 건느려고 내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대안(對岸)으로 건너갔을 때 천사들이 그 거룩한 어머님을 안고 오는 것을 보았다. 이 초자연적 돌발사가 「배아스」의 모든 성직자들로 하여금 장백의를 입고 아이들을 포함한 모든 주민들을 거느리고 10자가를 앞세운 행렬을 지어 <예수의 데레사>를 나와 맞게 했다. 그리하여 24일에 수녀원이 창립되었고 그곳에서 작년에 「파스트라나」에서 허원한 <그라시안> 신부를 처음으로 만났다. <후리안> 신부는 그때 비로소 <그라시안> 신부의 손에서 성의(聖衣)를 착복했다. 당시 30세의 <그라시안>은 「안달루시아」 지방의 「선족 갈멜」 수사와 「완율 갈멜」 수녀들의 교황순찰사였고 60세가 된 <데레사>는 그를 어머니로서 또 누이로서 사랑했다. 그는 <그라시안>을 <필립 2세>에게 천거하여 「선족」과 「발족」을 관구적으로 하루 바삐 분리할 것을 진정했다. 그때 벌써 「완율」과 「개혁」 사이에 반목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그해 5월29일에 「세빌랴」에 수녀원이 창립되었으나 <루베오> 총장과 <그라시안> 순찰사와의 의견 착오로 <데레사>는 수녀원 창립의 중지명령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한 군데 수녀원 안으로 은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576년 6월4일에 <아나 데 산 아도 베르트>가 「카라바카」에 수녀원을 창립했다. <데레사>는 그해 「세빌랴」를 떠나 「톨레도」로 와서 「순시시법」(巡視法)을 쓰기 시작했다. 「선족」편의 책동으로 박해가 이해에 들어 더욱 가혹해졌다. 1577년 7월2일부터 「심궁」(心宮-Interior Castle) 쓰기 시작하여 그달 말경에 「아빌라」로 돌아와 11월5일에 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