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釜山(주산) 聖和園(성화원)
반신불수로 성당건립
낡은 이불로 제대 꾸며
레지오 교본 2권으로 신앙지속
발행일1960-10-02 [제248호, 3면]
지난 8월 31일 부산 구평동(舊平洞)에는 나병환자 수용소 「성화원」(聖和園)에 천주교성당을 짓고 감격과 눈물어린 낙성식을 하였다.
망각(忘却)의 세계에 사는 그들, 흙담과 풀잎 속에서 막연한 내일을 꿈꾸던 그들에게 서광이 깃들기까지는 기구한 길을 걸어온 것이다.
부산 다대포(多大浦) 채 못미처 장림(長林)동에서 1키로 가량 떨어진 조용한 산마루에 지금부터 8년전 6·25 동난때 희생된국군들의 요양소가 원주(原州) 대명으로 이동하자 김해군(金海郡) 명지면(鳴旨面) 신생도(新生島)에서 임시 집단생활을 하던 5십여명이 나호나자들이 이곳으로 옮아온 것이다.
약 8십세대에 4백여명의 환자들이 사는 곳, 여기에 신앙이 들어온지는 오랜 이야기겠지만 손가락질 받던 몇사람의 천주교 신자들의 고충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8십여명 열교인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꾸준히 노력했다.
<이나시오> 서(50세)씨는 과거 열열한 열교인이었다.
5·6년전 개종한 이래 씨는 눈물겨운 침묵과 노력의 감투 3년을 계속하여 겨우 2십4명을 영세케 하고 남자 혼합의 「레지오」군단을 조직했다.
작년 9월 초하루 『치명자의 모후』라는 이름을 붙이고 11명의 단원들이 여기저기 쫓겨다니며 기구와 활동생활을 계속 타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그들이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제작년 가을 따뜻한 양지쪽 산 허리를 허물기 시작했다.
그러나 육신만이 살았지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은 여자 4명 남자 4명에 불과했으므로 공사의 능률이란 보잘것 없었다.
이들은 용기를 잃지 않았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이들의 정성이 전하여저 잃을 수 없는 지도자 <요아킴> 원(元) 신부 (부산 초장동 주임)을 맞나 원신부의 적극적인 협조로 약 7십여평의 강당이 지난 8월 31일 작성식을 보게된 것이다.
『정말 피흘리고 눈물흘렸음니다』 라고 그들의 기쁨을 말하는 이들은 감격어린 눈물을 씻고 있었다.
때마침 기자가 찾아든 날은 이곳 「쁘레시디움」의 주회합이였다.
낡은 이불보로 제대를 꾸민 주회합 광경은 외관상으로는 초라했다.
교본은 불과 두권 「떼세라」도 부족하여 서로 교대로 보고있었다.
필수적으로 가져야 할 이들의 소지품도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특히 전교활동에 「교리문답」책이 없다. 그렇다고 이들의 경제로서는 허락할 수 없는 안타가움 『그러나 우리는 기쁩니다』라고 이들은 또한사람의 은인을 소개한다. 그는 원장 <이순영>(李舜泳)씨다. <이> 원장님의 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미숙한 본인이 이 어려운 사업을 맡게된 것도 벌써 4, 5년이 되었읍니다 내가 여기에 와서 느낀 것은 우선 요양원 환자들에게 특수한 환경과 시설로 이들의 정신면의 안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첫째 생활면에 불편한 것을 없이 하고 둘째로 특수한 요법으로 재생의 희망에 확신을 주고 세째로 이런 생활 속에 자유와 평등을 부여하여 한갓 새로운 생활욕을 북돋우워주고 싶다』
이런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우선 40동(棟)의 주택을 건립하고 있다는 것이며 자급자족의 기반을 확립하기 위하여 2만평의 땅을 더 사들였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