連載小說(연재소설)(實話(실화)) 아빌라의 美人傳(미인전) (1)
발행일1960-10-02 [제248호, 3면]
머릿말
먼저 독자에게 밝힐 것이 있다. 이제부터 전개될 이 「미인전」은 사실은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전」이 나에게 시키는 이야기다.
이 원본은 <대 데레사>와 관련있는 동시대인의 문헌 9종, 그에게 관한 가장 중요한 서적 6종, 그에 대한 참고서 10종, 순전한 그의 전기 31종, 그의 동시대 「스페인」에 관한 각 방면의 역사 28종, 거기다가 16세기 생활풍속에 관한 전문서까지 6종을 보태어 <대 데레사> 자신의 전집을 토대로 한 「창작」이다. <앙드레 모로아>가 격찬하는 서문을 붙인 이 「프랑스」어 「창작」의 작자는 <마르셀 오클레이르> 역사이며 그 초판이 1950년에 「파리」에서 나왔다. 내가 이제 대면하고 있는 이 영역은 1953년의 「런던」판이며 그 역사가 역시 <캬스린 폰드>라는 여성이다.
이것을 내가 번역하게 된 것은 <서기호> 신부의 창의(創意)와 「일본」서 다녀가신 「갈멜」회 관구장 <삐에르 루이> 신부의 격려로 시작되었다. 아침 「갈멜」이 우리 앞에 「크로즈업」되고 있는 이때에 현 「개혁」된 「갈멜」의 창립자인 <대 데레사> 성녀가 소개됨은 극히 섭리적이나 그 일을 떠맡은 나의 동기가 극히 속세적이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독자들은 이 연재가 장차 단행본으로 나오려는 상당히 큰 완뎍본의 예고편임을 기억하시라.
먼저 「동방의 사도」인 <방지거 사베리오> 성인이 「스페인」사람임을 기억하라. 그를 파견한 「예수회」의 창립자 <이냐시오 로요라> 성인도 역시 그렇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도 그 나라의 여성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 성인들과 동시대 사람이다.
「독일」서는 1519년에 <루터>가 「영국」서는 1533년에 <헨리 8세>가 「로오마」를 배반했고 여기 저기서 각종의 소위 「종교개혁」의 선풍이 전 「유럽」 을 휩쓸고 있을 때 1538년에 창립된 「예수회」가 「반종교개혁」의 주력이었다.
외적(外的)으로는 당시 해이(解弛)했던 것을 더욱 엄격하게 단속함이 진정한 교회의 「개혁」이었고 그 진정한 「개혁」의 실천적 동(動)은 언제나 내적(內的)으로 영혼의 밑바닥까지 파들어가는 명상적 정(靜)에서 솟았다.
역시 「반종교개혁」자료 볼 수 있는 <대 데레사>는 그러한 점은 공통하나 남성 <로요라>가 새 집을 지은데 비하여 그는 오랜 헌집을 고치느라고 더욱 많은 욕을 보았다.
그가 엄격한 원시적 「갈멜」의 「회율」(會律)로 돌아갈 결심을 한지 2년만인 1562년에 「아빌라」에다 최초의 「개혁」된 「성요셉 갈멜수녀원」을 「창립」하는데 성공했다.
그가 1515년에 탄생하여 1582년에 죽기까지는 16세기에서도 가장 어수선한 시절이었다.
전 「스페인」이 <에라스무스>의 지지와 반대로 갈라져 말다툼이 칼싸움으로 벌어졌고 「알룸부라도」와 같은 비끄러진 신비사상이 번지고 종교재판의 서슬이 아직도 시퍼렇고 「갈멜」의 수도생활은 극도로 해이했었다.
이 「회」는 원래 「사마리아」 「갈멜」산의 은수생활 가운데서 시작되었다. 대개 570년경에 있었던 수도원의 옛터에 1155년에 <베르톨두스> 성인이 새 수도원을 세우고 그의 후계자 <부로칼두스> 성인이 1209년에 「예루살렘」의 <알베르투스> 총대주교에게 「회율」을 청하여 그후 <호노리우스 3세> 교황의 묵허를 받았다. 그 분원이 동방에 15처가 있었으나 「사라센」인의 침략을 받아 타국인 수사를 본국으로 돌려보냈다. 1238년에 「사이푸라스」도 <시시리>도의 「메시나」 「마르세이유」에 분원이 설립되었다. 1240년에 「영국」 최초의 「갈멜」수도원이 설립되었고 1254년에 「프랑스」의 <루이> 성왕이 수사 6명을 「파리」로 불러다가 수도원을 세웠다. 그후 이 제도는 「스페인」 「애란」 「스코트란드」 「독일」에 전파되었다. <인노켄티우스 4세> 교황이 1245년에 이 「회」의 「회율」을 변경하여 다른 은수자 「회」와 한가지로 성직에 참가시켰다.
총회장 <시몬 스토크> 이래 대학도시인 「겜부릿지」(1249) 「옥스포드」(1253) 「쾨룬」(1256) 「볼로냐」(1250) 「트리에르」(1286) 「마인쓰」(1288) 등에 「갈멜」회의 수도원이 설립되었다.
1394년부터 1406년에 걸친 「흑사병」의 연만으로 수도사의 수가 격감되었고 1432년에 <에우게니우스 4세> 교황이 「회율」을 완화했다.
복자 <요안 소레트<가 총회장 시대인 1452년에 비로소 여자 「갈멜」 수녀원이 부설되었다. 「회율」의 이완(弛緩)에서 생기는 폐단을 개혁하려는 운동이 각국에서 있었으나 오직 이 신비가(神秘家) <대 제레사>와 <십자가의 요왕> 성인의 합작으로 「개혁」이 이루어졌다. 나무신을 신을 그들이 가죽신을 벗었다는 뜻으로 선족(跣足)파라고 불리웠고 「완율」(緩律)칙을 이화(履靴)파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