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교구장 <헨리> 주교는 사회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하루는 어느 도시의 공식환영을 받게되었다. 목적지를 서너「마일」 남기고 「엔진」이 스톱. 그는 그만 홍띠를 풀어던지고 뛰어내려 수단까지 벗고 찦차의 두껑을 떠들어 차의 5장6부를 주물럭거리기 시작했다. 기계공(機械工)이 하는 버릇으로 그는 기계유가 시커멓게 묻은 손으로 이마를 두어번 문댔다. 햇살까지 뜨겁게 내려쪼이니 주교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엔진」이 다시 소리를 내고 승객들이 올라타고 「찦」차는 그 도시로 속력을 냈다. 시외까지 나와서 기다리는 시장 이하 유지들과 환영 「프라카드」를 들고 늘어선 시민들을 본채만채 쏜살같이 성당으로 직행. 이마와 코밑이 온통 기름투성이가 되어 차에서 나오시는 주교님을 보고 그곳 노(老) 회장님은 질겁했다. 주교님은 얼른 세수를 하고 주교의 정장을 다시 차리고 시외까지 「배크」.
그때부터 새로 입성식(入城式). 이번에는 분렬식(分列式) 속도로 서행. 결국 군중들에게 환호(歡呼)하는 기회르 ㄹ주었다. 축구경기 때에 흔히 볼 수 있는 「쿼타백」(축구경기의 부서)의 정신을 집중하고 재빨리 방향을 잡는 생기가 감돌고 군인같이도 보이는 그는 체격이 꽉째여 야무지며 활기가 뚝둑 뜯는 50때의 인물이다. 사실 그는 한때 군대생활도 했었고 신부가 안되었더라면 「쿼타백」이 될번 했었다. 그는 원래 항종의 일파인 「모라비아」교도의 가정 태생이었기 때문에 신부를 무서워했다.
성당을 지날때마다 맥이 툭툭거릴만큼 무섬증이 들었었다. 그의 부친은 인쇄기 부속을 발명할만한 기계공이었고 그는 늘 기계노리개를 받았다. 그가 열상 때 모친이 별세하고 나서 그나마 빠듯한 생계가 한때 끊어져 역시 신부가 된 아우와 함께 할아버지 슬하에서 크기도 했고 친척집에서 자라기도 했다. 부친의 재취처가 가톨릭 과부였다.
<하롤드>는 계모도 이부(異父) 누이들도 무섭지 않았으나 아직도 성당이 무서웟다. 이무렵에 공립국민학교에 다니면서 짬만 있으면 「뽈」차기에 열중했었다. 새(新) 누이로부터 「성 스더왕」국민학교에 축구팀이 있다는 말을 듣고 유혹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가톨릭 개종만은 절대로 않기로 굳게 먹고 그는 7학년에 전입했다. 그러나 마침내는 「뽈」차기보다는 「노뜰담」성당의 그림이 좋아졌다. 가톨릭에 대한 괴상한 선입관이 한껍질씩 벗기어졌다. 성체 도리를 배웠을 때 「마리아교」라는 오해가 풀리자 오주께 대한 보다 깊은 신앙이 바로 여기 있구나 하고 1922년 5월에 영세했다.
바로 그해 여름 어느날 아침식사때에 도착한 「골롬반」회의 「극동」월간에 「내부라스카」의 「오하마」에 새로 건축된 신학교의 사진이 있었다. 성적이 우수하면 7학년생도 받아준다는 것이었다. 교우도 아닌 그의 부친이 문득 『<하롤드>야 너 「성골롬반」신학교에 안갈래?』하고 물었다. 당설였으나 생각할수록 좋아보였다. 그리하여 견진 전에 신학생이 되었다. 1932년에 신품을 받고 중국으로 파견되어 가는 도중 일본 「고베」에 기항했을 때 변경된 명령의 전보를 받았다. 그곳 『한국이란 도대체 어디 붙었읍니까?』라고 다른 선객에게 물어야 했었다. <하롤드> 신부가 다른 9명의 선구자들과 함께 한국에 도착한 것이 1933년 「그리스도왕」축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