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남터 殉敎者(순교자)글과 聖敎(성교)의 最後勝利(최후승리)
발행일1960-10-02 [제248호, 4면]
금년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남인(南人) 학자들의 자발적인 교리연구의 결과로 성교회가 창설된지 175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이러한 뜻깊은 해의 복자성월을 맞이함에 있어서 특히 성직자들의 순교지이던 「새남터」에 대하여 생각하여 봄도 뜻있는 일이라 하겠다.
「새남터」(沙南基)는 원래 서울성으로부터 10리(4粁) 쯤 떨어져 있는 곳인 한강(漢江)가의 백사장으로서 「새풀이」 또는 이촌동(二村洞)이라고도 불리워지던 곳인데 이곳을 군대의 훈련장으로 쓰게되었다. 이러한 군대연병장(軍隊練兵場)을 특히 외국인이던 성직자들의 사형장으로 쓰게된 데는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위정자들은 평화의 사도이던 천주교신자들을 사형에 처함에 있어 국가에 대한 반역죄로 몰아 가장 엄한 형벌이던 군문효수형(軍門梟首形)을 가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군문효수라는 형벌은 수백명의 군인이 보는 가운데서 죄인의 목과 손발을 잘름으로써 한몸을 여섯토막으로 나누고 특히 그 머리를 말뚝에 꽂아 사람들이 많이 나디는 곳에 세워서 경계의 표본으로 쓰게한 형벌이었다.
이러한 형벌로써 처음에는 평교우들을 일반 국민들이 많이 왕래하던 서소문(西小) 밖 네거리(前副統領官邱西方에 있는 義州通 네거리)에서 죽이게 되었으나 특히 외국인 성직자들을 바로 성문밖인 이러한 곳에서 죽임은 불길한 일이라고 여겨 그들의 사형장은 구태여 먼 「새남터」로 옮기게 되었다. 이리하여 「새남터」에서는 전후 10명의 외국인 성직자와 1명의 방인신부가 거룩한 피를 흘리게 되었다.
우리 성교회에 대한 첫번째의 큰 박해로서는 1801년에 일어난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있게 되었는데 그때에 있어서 이미 6년전부터 비밀리에 전교하고 있던 중국인 <야고버> 주(周文謨) 신부도 잡히어 그해 5월 31일(음4월 20일)에는 45세로써 「새남터」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이때 전국 교우의 수는 1만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나 그중 3백명 이상이 순교하게 되었다.
두번째로 일어난 큰 박해는 기해박해잉ㅆ는데 이때에는 3명이ㅡ 불국인 성직자들이 같은 곳에서 순교하게 되었다. 즉 조선교구의 제2대 주교이던 <앵베르 노렌죠>(범世亨)을 비롯하여 <모방 베드루>(羅伯多祿) 신부와 「샤스땅 야고버」(鄭牙各佰) 신부들은 1836년 이래 전교하다가 잡히어 1839년 9월 21일(음8월14일)에 순교하게 되었는데 <앵베르> 주교는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땅> 신부는 각각 35세이였다 이때 전국 교우의 수는 9천명을 헤아리고 있었으나 2백여명이 순교하게 되었다.
세번째로 일어난 큰 박해는 1846년에 있었던 병오박해(丙午迫害)이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최초의 방인신부이던 <안드레아>(金大建)을 비롯하여 근20명의 교우가 순교하게 되었다. 이때 전국교우의 수는 6천명을 헤아리고 있있으나 김대건 신부는 그해 6월 5일(음 5월5일 端午날)에 잡히어 9월 16일(음 7월 26일)에 26세로서 순교하게 되었다.
한편 그때의 전교총회장으로서 김대건 신부와 더불어 상해(上海)가지 왕래하면서 사선을 몇번이고 돌파하던 <가오로> 현(玄錫文)도 그해 9월 19일에 「새남터」에서 목을 잘리게 되었는데 그는 유명한 순교사기(殉敎史記)인 기해일기(己亥日記)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네번째로 일어난 큰 박해는 대원군 이시응(大院君李是應)이 정권을 답고 1866년부터 1871년까지 이르는 사이에 있어서 거의 해마다 일으킨 병인박해(丙寅迫害)이었다. 이때 전국 교우의 수는 2만3천명 이상이었는데 그들중 거듭한 박해로 말미암아 순교한 성직자가 9명, 교우가 1만명 이상이나 있게 되었다. 그들중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직자는 제4대 주교이던 <베드루> 장(長敬一)을 비롯하여 <쁘르트니에르>(白) 신부 <뿌뤼> 서(西沒禮) 신부 <도디> (金) 신부 <프리니코라> (朴) 신부 <푸르티> (新妖案)의 6명이었는데 이들중 앞의 네분은 1866년 3월 8일(음 1월 21일)에 목을 잘리고 끝의 두 분은 3월 12일(음 1월 25일)에 각각 순교하게 되었다.
이상으로써 「새남터」에서 순교한 성직자들의 내력을 알 수 있다고 보는 바이나 한편 그들의 순교사실은 그대로 피에 젖은 우리 성교사의 편모를 말하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전후 80여년을 두고 그처럼 혹독하게도 성교를 박해하던 이씨왕조(李氏王朝)는 그릇된 쇄국주의(鎖國主義)의 봉건정책을 쓰던 끝에 멸망하게 되고 그와는 반대로 정의와 평화를 표치(標幟)한 성교회는 대원군의 몰락과 더불어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러한 성교회의 최후승리는 오로지 1만수천을 헤아리는 유명무명의 교우들이 흘린 거룩한 피가 씨로 되어 꽃을 피고 열매를 거두게 한 것이라고 믿어진다. 성교회 창립후 175주년을 맞이하는 이때에 있어서 우리교우들은 더욱 신망애(信·望·愛)의 삼덕을 두터이 쌓아 이 강토를 성화하는 일에 매진하여야 하겠다. (1960·9·26=서울大學校 文理大 敎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