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深夜偶感(심야우감)] 司祭職(사제직)은 기백을 便(편)들 때와 못들때
발행일1960-10-09 [제249호, 1면]
도덕문제에 관해 사제들은 일치한다
신부 노릇을 하려면 기백(氣魄)이 있어야 함이 한번 두번이 아니다. 가끔 신부가 『편을 들』어야 하는데 그런 경우에는 두려움이 없이 또 덕보리는 기대를 말고 공공연히 굳세게 나가야 한다. 남들의 평이 아무리 인기가 없더라도 신부는 교회의 확립된교훈과 십계명의 『편을 들』어야 한다.
문제에다 원칙을 적용할 때는 언제든지 신부는 『편을 들』어야 하는데 어떠한 중요한 문제에 대한 어느 신부의 대답이라도 「서울」서나 「모스코」서나 「로오마」서나 다 한가지라야 한다. 『아욱, 당신이 그렇게 말할줄 나는 알았읍니다! 당신내들 신부들은 다 똑같거든!』
이런 말을 여러 신부들은 자주 듣는다. 속이 상해서 하는 그런 말 가운데는 치하(致賀)의 뜻이 있다…… 신부가 받아들여 자세하게 설명하는 원칙의 공정함에 대한 치하다.
신부들은 실지 문제의 밑받침이 되는 기초를 식별(識別)하도록 훈련되어 있다. 신부들은 「인생의 사실」들을 냉소(冷笑)하지 않고 동정심으로 받아들이는 동시에 동찰력과 집요성(執요性)으로 「영원의 사실」을 받아들이도록 교육되어 있다.
그러나 세간사(世間事)에 있어서는 신부들 각자의 의견을 서로 달리하고 각자의 호불호(好不好)가 있다. 평신도들을 때로는 바로 자기 본당 관내에서 편가르는 사건에 있어서 신부들이 『편을 들』수가 없기 때문에 때로는 신부들이 과감(果敢)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러한 합법적 논쟁(論爭)의 분야이다.
신부의 직책은 일종의 일치이며 결코 분리가 아니다. 신부의 사명은 자기와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상대로 한다.
사제(四祭)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대의(大義)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의리(義理)와도 한편이 됨으로써 우리 효과(效果)를 타협시킬 수가 절대로 없음을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타협하거나 또는 일찌기 타협한 일이 있으면 그리스도의 대의를 유린한 것이다 .
이것이 우리 사제들의 사사 의견을 부인하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다 자기 의견이 있다. 어떤 때는 우리 의견이 옳고 어떤 때는 끊다. 또 어떤 때는 자기 개인적 선택을 고집해야 할 경우가 너무도 많다. 편당적 또는 정치적 사건을 안정시킴이 교회의 사무가 아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差異)를 애덕으로써 통일정리하는 일이 교회의 사명이다.
신부는 천주의 종이다. 신부는 모든 사람이 자기로 하여금 공정한 입장에 있게 하고 자기를 승관(昇官)운동이나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말기를 바라는 때가 더러있다.
평신도는 분규의 세계에 익숙하다. 평신도들은 자기들이 최선이라고 정직하게 믿는바 무엇에든지 담대하게 단호한 태도를 취할 권리가 있다. 다른 사람들은 정직하게 불찬성할 수도 있다. 이러한 분야에서 신부들은 비록 관심이 없는 바는 아닐지라도 중립적이며 또 삼가한다.
우리 사제들은 중요한 일에는 『편을 들』수 있고 보다 사소한 사건이 관련되는 경우에는 제한과 근신으로 살기 때문에 천주의 사업을 위해서는 두려움이 없이 단호한 태도를 취하여 보다 중요한 일을 위해 해탈(解脫)이 필요할 때는 해탈한다는 남부러운 명망을 얻는 것이다.
-1960년 한국순교자축일 밤 (筆者 光州敎區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