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포] (72) 全州(전주) 殿洞(전동)성당
반석같이 뿌리 깊어
예비자 늘이기 공동작전해
발행일1961-06-25 [제284호, 3면]
우리나라 교회 건축의 형이 「고딕」식과 「비산틴」식으로 대별된다.
「고딕」식으로 지은 성당들은 전국 도처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흔하지 않은 것이 후자인 「비산틴」식 건물인대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있다면 이곳 전주의 전 교구장좌(한 주교좌)인 이 전동본당이겠다.
「비산틴」이니 「고딕」식이니를 세밀히 따지자면 건물구조 생김새 하나하나를 들여다 보고 엄밀히 따지겠으나 외모로 우선 손쉽게 구별한다면 종탑이 모나지 않고 둥근 것이 「비산틴」식이라 할 수 있다.
193평의 이 돌성당이 55년의 풍우를 겪었다는 자취를 쉽게 한눈으로 알 수 있다. 벽돌 하나하나에 끼인 검푸른 이끼 성당 앞뒤의 육중히 뻗은 노송(老松)들은 전주시의 남문 밖에 그야말로 반석(盤石)같이 뿌리깊어 보인다.
서양문화의 도입처(導入處)로 알려진 신기한 풍습을 전하고, 외모가 우리와 같지 않은 백인들이 드나드는 이 전주 도입지부(?)에는 어제나 오늘도 갓쓰고 긴 담뱃대를 문 시골 할아버지들이 찾아든다.
회장들의 사랑방에는 이 본당에 벽돌이 쌓이고 종각이 올려질 무렵 코흘리며 겨우 성모경을 외웠다는 할아버지 회장님들이 10여 명 모여 앉아 『요리강연』을 주고 받고 또 시중 쌀값이 또 오른다고 걱정하며 방을 지키고 있다.
1957년 주교좌가 중앙성당으로 변경되기까지 전주주교좌이던 이 본당은 1905년 「불란서」인 <보드네> 윤신부님에 의해 본당이 되고 첫 미사가 드려지면서 전주의 희망탑이기도 했다.
2대까지도 「불란서」 신부 손에 운영되던 전동본당은 3대부터 방인 신부 손에 옮겨져 현 12대인 <분도> 강(姜允相) 신부에까지 대를 이으며 영생에의 중계소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성당은 1912년 초대주임 윤신부에 의해 준고오디었고 1930년 강당과 이젠 전북도 내의 유수한 훌륭한 학교로 발전 중인 성심여중교가 신축되었고 이어 1954년에는 다시 사제관과 성심여고교가 신축되여 전동1곽(殿洞1郭)을 통채 차지하며 천주 영광을 현양한다.
또 바오로회 수녀들의 지도로 운영되는 유치원은 전국에서 이름이 높고 길건너의 성모병원은 수만의 나약하고 병든 이웃들을 고쳤다.
사진을 한 장 찍겠다고 청하니 『그러면 면도나 하고 찍자』고 다시 세면실을 다녀나온 육중한 <분도> 강신부님은 부임 당시의 3천명 신자들이 4천5백으로 늘고 셋 공소 교우만도 9백이 되니 일이 벅차다고만 겸손하신다.
그러면서도 자랑은 이젠 말을 하지 않고 역설하지 않아도 고해성사 보는 교우, 영성체 하는 이, 성당조배하는 신자 그리고 성로신공 하는 형제들이 많아 기쁘며 교우 수에 비해 딴 본당보다 일이 쉽다고 자랑한다.
보수적인 이곳 전주 시내에서의 전교에는 아직도 돌파하기 힘든 난관들이 있음을 시인하면서 「꼬미씨움」의 본부이면서 8개 「쁘레시디움」이 있으니 이것과 신우회 그리고 회장단 등 여러 평신도와 공동으로 계속 예비자 늘이기에 힘쓴다고 설명한다.
자유당 치하에서는 1년 영세자가 400명이 넘었는데 이제 그 고개를 넘지 못한다고 회고하고 이유를 연구한다는 신부님은 이상의 여러 교회 「악숀」에 새로운 JOC(가톨릭 노동청년)운동도 시작하고 싶다고 강신부님은 덧붙였다.
교리 경시대회의 성과가 신심생활을 자극하고 교리지식 함양에 효과적이라고 술회하면서 <분도> 신부는 우리 자랑의 또 하나는 매년 복자첨례를 앞두고 치명자 <누갈다> 이님의 묘소 치명산(致命山)에 가서 9일기구를 드리는 것이라고 하며 하직 하려는 기자에게 「가톨릭시보」를 읽으라고 매주일 강론 때마다 강조하고 있다고 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진은 노송에 둘러싸인 성당과 12대 주임 <분도> 강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