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歐羅巴(구라파) 기행 - 본대로 느낀대로]
各民族(각민족) 文化財(문화재)고히 간직
참새 비둘기 무릎에 들고
발행일1960-10-09 [제249호, 4면]
그러니까 「비엔나」거리를 헤멘지도 한 열흘은 되는 모양이다. 「비엔나」대학을 중심으로 한바퀴 돌고 성 「스테파노」대성당을 중심으로 맴돌고 하는 동안 많은 시간을 보내고만 것이다.
이젠 곧 잘 땡볕을 좇아 공원 「벤취」에 앉았노라면 참새떼 비둘기떼들이 모여와서는 먹을 것을 달라고 발등을 간지럽힌다. 글쎄 내가 뭣을 줄 수 있단 말인가?
가냘픈 날짐승들의 창자를 채워줄 수 있을만치도 내게 줄 것이 없단 말인가?
호프만의 뱃노래
어느 키다리 미국친구의 권고로 같이 백마(白馬) 두 필에 근사하게 차린 마차를 「부르그」극장 앞에서 불러탔다. 슬슬 굴러가는 품이 어느 공작전하(殿下)를 모시고 가는 거처럼.
천년 고도(古都), 천년동안 줄곳 이곳이 수도이었던 것이다. 그때문에 이곳은 「구라파」적인 존재이요 사실 그렇게 말할 수 있으리만치 「오지리」만이 아니라 각 민족의 문화재(文化財)를 고히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고딕」 「바로크」 등 즐비하게 서있는 건물 그리고 미술품 그 어느것을 들어 값으로 표현할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던 그리스도의 말씀 그것은 곧 지난날의 찬란턴 문화의 종합이 아니고 오늘과 및 내일을 위한 참으로 영성적인 「신볼」이 어디 있느냐고 무르신 것으로 생각된다.
성 「스테파노」 대성당 이곳은 꼭 시가 한 복판이다. 중세기에 세운 이 위대한 예술품 앞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으리라. 대전(大戰)중 폭격의 흔적은 거의 가셔졌고 바야으로 지붕 수리를 거의 끝내고 있는 중이었다. 이렇게 들추어간다면 책을 엮어야 될 모양. 벌써 마로 피곤한 다리를 이끄는 것 같고 안내자의 목소리도 텁텁해졌다.
고요히 저므는 「비엔나」의 저녁노을 그무렵 으스름 달빛마냥 가로등이 켠다. 이것이 「비엔나」의 또한 가경이란 말이 기억난다.
음악가 <김진규>씨의 안내로 「오페라」구경을 갔다. 흰샤쓰를 갈아입고 간 것이 만행이었다. 무대 효과도 굉장하지만 「오케스트라」 반주 그보담 박수가 그야말로 우뢰같은데다가 「앙콜」 삼창정도가 아니라 7창 8창을 부르는데는 시시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호프만」의 뱃노래 그 잔잔한 물결마냥 출렁거리면서 끌어올리는 「이모슌」의 성난파도 그 사이에 요정(妖精)은 여인의 깔깔거리는 웃음을 높이면서 배는 사라지고. 이렇게 허전하기만한 나 그내를 위한 뱃노래였던가!
조국이 있어야
지난번 가톨릭 노동운동에 관해서 다소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것 역시 가톨릭 「액숀」의 한몫일 것이다. 가톨릭 「액숀」의 체계(體系)에 대해선 후일로 미루거니와 이곳서는 빈틈없는 조직을 먼저 이루고 철저한 이론(理論)의 의론(議論) 위에 실천해가고 있다.
이론의 추구(追究) 혹은 까다로운 조직같은 것이 어찌보면 그렇게 수다스럽게 있느냐 실천과 행동이 제일이지 하는 생각도 들게한다. 허나 지금 가톨릭은 목전에 적을 두고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직적인 적을 주변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조직에 허술한데가 있으면 그곳으로 적은 용서없이 침입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
통계없는 활동이라니
가톨릭 국제종교사회연구소(ICARES)라는 데를 가보았다. 소장 한 사람 여비서(타이피스트) 한 명 연구생으로 일본인 한 명이 있을 뿐이다. 헌데 여기서 작성된 수많은 통계, 도표, 연구논문 등 「오지리」전교구 각 본당을 손바닥에 두고 볼 수 있게 자세한 통계를 꾸며두고 있다. 실은 이따위 이론조사 등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도 처음엔 없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이 한 곳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각 주교들이 무근 계획을 할 때는 이곳에 문의해 오는 실적(편지)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무슨 조직을 꾸밀 때 그것이 몇사람들의 흉중에 있는데로 그려질 것이 아니라 적어도 상당한 기본조사 그리고 대사회(對社會) 실정을 고려해서 그야말로 조직적으로 무엇이 되어야 할 줄 안다.
宗敎活動이 모든 것에 優位
「오지리」에서 여름동안 수많은 가톨릭 전국대회가 있었다. 그것은 나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이런 전국대회는 사회적으로 큰 움직임이 되고 이보다 더 큰 시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정당의 움직임과 맞서려는 (물론 영성적인 더 큰 의의만을 고려하지만) 당당한 기세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강력한 조직 위에 선 당체 행동인 것이며 이는 필경 사회관계(社會關係)를 더욱 긴밀히 하며 보다 좋은 방향으로 또 공동으로 우리 모두가 달게 말하는 공동선(共同善)을 실천해 갈 수 있는 길인 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