懺悔道(참회도)로서의 宗敎(종교)
발행일1961-06-25 [제284호, 4면]
【編輯者 註】 이 글은 東國대학교 문리대 교수 <토마스> 이(李箕永)씨가 5월11일부터 5월13일까지 전기교 종교학회가 한국에 퍼져있는 여러 종교의 종합적 연구를 하고 앞날의 지표(指標)로 삼으려 개최한 강연회에서 13일 한 강연 전문이다.
현대의 무신론자(無神論者)들은 그가 「맑스」주의자(主義者)이건 인도주의자(人道主義者)이건 또는 허무주의자(虛無主義者)이건 종교에 대한 일종의 『구토』(嘔吐)를 느끼고 있다. 그들의 비난의 욧점은 대체로 첫째로 종교는 인간의 현실생활을 부정(不定)하며 인간을 다만 현실도피적 피안이라는 것이다. 신(神)은 인간의 날조물(날造物)이며 더구나 인격신(人格神)의 개념은 서구적 산물이라 한다. 『신은 이미 죽었으며』 교회는 무용(無用)의 장물(長物)이라는 소리가 동양의 전통적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요란(擾亂)하다. 인간의 문제는 인간만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며 지나친 피안이상은 인도주의에 위배(違背)된다고도 한다. 그리하여 종교는 『착취적 지배계급의 또 하나의 억압수단이거나 기만수단』이며 하나의 『환상적(幻想的) 태양』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둘째로 비난은 소위 종교인들의 윤리상비위(倫理上非違)를 찌르고 있다. 현대의 무신론자들에 의하면 종교는 위선의 도가니이다. 그들은 묻는다. 구원(救援)의 약속을 과시(誇示)하며 사랑과 자비의 구호를 고창하는 종교인들간에 어쩌면 그렇게 심각한 불화와 반목과 분파주의(分派主義)와 피의 참극이 연출되었던 것인가? 관용 대신에 독선적자만(獨善的自慢)이 이해(理解) 대신에 멸시 내지는 정복의 욕심이 더 횡행하는 것은 어찌된 셈인가? 신적(神的)인 사랑은 인간적 사랑 따위와는 상통하는 아무 것도 없단 말인가? 그리스도자(者)나 출가승(出家僧)은 벌써 그 사실 자체로서 윤리적으로도 완성된 성자(聖者)가 되었단 말인가? 종교를 다만 그 직업으로만 알고 있는 종교인들이 얼마나 허다하냐? 종교는 값싼 「멜랑꼬리」(感傷)의 발산이기만 한 것ㅇ니가? 그렇지 않으면 종교는 구호물자나 구미 유학장학금을 얻기 위한 수단밖에는 못된단 말이냐?
허다한 공격의 화살이 이 나라 종교인들에게 퍼부어지고 있다. 첫 번째 비난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명확하며 누구든지 참종교의 본질 자체를 아는 사람은 그와같은 비난이 이유 없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두 번째 비난에 대하여는 서투른 변명을 시도하기에 앞서 심각히 자기 스스로를 반성하는 일을 게을리 할 수 없다.
■ 참 宗敎는 現實을 不定하지 않는다
현실이 부정되지 않는다는 말은 인간과 그의 노동이 적절한 가치평가를 받는다는 말이다. 어떤 종교사상체계(宗敎思想體系)는 인간과 그의 해우이일체를 아무리 가치지을래야 지을 수 없는 논리적 결함을 내포하고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상체계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적ㅇ긴 것에 대한 과대평가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덮어놓고 무시되기만 하고 인간이 덮어놓고 긍정(肯定)되기만 하는 것이 종교라면 그런 종교는 전기한 첫 번째 비난들을 면할 길이 없다. 그러나 참종교는 인간이 비참하기만 한 존재도 아니며 또 위대하기만 한 존재도 아니라는 근거 위에 서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행위는 일부의 종교인들이 믿는 바와 같이 죄악적(罪惡的)이기만 한 것도 아니며 또 다른 일부 종교인들이 믿는 바와 같이 선한 행위라 할 지라도 그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은 아니다.
선의 지향(志向)을 충분히 가치 있게 하는 유일한 계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죄업(罪業)에 허덕이며 구원을 갈망하는 인간들에게 대한 막연한 보장조차 없는 상태를 근본적으로 전환시킨 구원의 주자신(主自身)의 직접적인 계입을 통해서만 가능하였던 것이다. 창조의 주자신이 인간이 되시어 우리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고 가셨다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과 그 노동은 처음으로 또 결정적으로 그 의의(意義)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가 보여줄 모범을 따라 그의 인간적 전능력을 가지고 속죄란 대업(大業)을 통하여 「그」의 창조의 입적에 참여할 가능성을 가질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 노력을 불교도들은 『환멸행(還滅行)』이니 『무아행(無我行)』이니 하였으나 그들의 불확실한 인간관(人間觀)은 불교도로 하여금 흔히 허무의 심연에 떨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일체개고(一切皆苦)』란 비관주의적(悲觀主義的) 사고방식은 『일체개락(一切皆樂)』이란 자포자기적 쾌락주의로 직전(直轉)할 수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이러한 두 개의 사조 속에서 참회(懺悔)란 참된 종교적 계기는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 宗敎的 眞理는 단 하나밖에 없다
참으로 진정한 종교는 인간의 온전한 역사적 제약 아래서 발전해 온 인간의 문화적 성과(成果)로서의 종교적 사상체계 및 종교적 형식 등에는 그 역사적 조건을 반영한 특수성들이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俗)된 역사 안에 부침(浮沈)하는 인간적 모색(摸索)의 성과인 것으로서 참된 계시(啓示)와 구별되어야 한다. 사실 현대인들의 빈축(牝畜)의 대상이 되고 있는 제(諸) 종교의 이론상(理論上) 제도상 난맥상은 바로 무엇이 본질적인 것이며 무엇이 부수적인 것인가를 깨닫지 못한 무명(無明)의 소치이다.
종교는 단순한 도덕도 아니며 신비주의도 아니다. 종교는 영원한 생명인 아버지와 탕자(蕩子)간에 있는 끊을 수 없는 관계를 사는 길이다. 그것은 암흑 속의 아들이 빛을 그리는 관계이며 원증(怨憎)과 죄악과 분열과 고통과 거짓의 종들이 사랑과 지선(至善)과 전일(全一)과 지복(至福)과 진실의 주를 갈구하는 길이다. 역사는 인류가 그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죄에 시달린 불안과 공포 속에서 이 영원한 희열의 존재를 직감치 않을 수 없었던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영원한 생명이 불려진 이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상위(相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대 인도인(印度人)들이 말한 것처럼 오직 『하나인 그』(Tad ekan) 『생명 있는 그』(Sa t)이었으며 그는 『하늘』(天)로써 상징된 『님』이었다. 십자가와 부활과 성신강림(聖神降臨)을 통하여 비로소 우리는 「그」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가 그의 탕자임을 자각하게 되었고 우리가 그 앞에 체읍(涕泣)하는 자유를 향유하는 기쁨을 알았다. 그 자유는 바로 참회의 자유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진리의 증거자』 <고-타마·신달타>가 그 제자들에게 회개의 눈물만이 그 죄를 씻을 수 있다고 가르친 사실을 성경의 같은 여러 구절들과 함께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스승을 잃은 무신론적 소승교단(無神論的小乘敎團)이 형식적 율법주의(律法主義)에 홀렸을 때 대승(大乘)의 신도들이 얼마나 열렬히 구속의 주를 갈망했던가를 동시에 상기할 필요가 있다. 신을 죽이려한 많은 사람이 있었으나 신은 오히려 섭섭히 그들의 옆을 떠났을 뿐 「그」는 영원히 다름 없이 살아 계시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종교가 종교일 수는 없다. 그와 동시에 참회 없는 종교가 또한 종교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을 사랑으로연결하여 신에로 지향하는 상향적(上向的) 움직임이 전제되지 않는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이러한 신과 인간과의 신비적 결합은 신 자신의 신비체-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져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종교에 있어서 교회는 불가결한 것이며 그것은 「그」가 단 하나인 것처럼 오직 하나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참된 종교는 따라서 어디까지나 신중심적 윤리(神中心的倫理)이며 신중심적 신비주의(神秘主義)이며 신중심적 인문주의(人文主義)인 것이다.
■ 宗敎人의 僞善은 重大한 瀆聖이다
현대 무신론자들의 종교비판의 둘째 「카테고리」는 우리의 타성적(타性的)이며 맹목적인 내지는 허위적인 신앙생활의 탈을 무자비하게 벗겨 주는 섭리적(攝理的) 경종이기도 하다. 『너희가 거룩하다고 자처하지 말라』란 꼐율은 불법(佛法)의 사중계(四重戒)의 하나이다.
사실 우리에게 허여(許與)된 창조의 자유란 우리의 적은 이기주의를 하나하나 제거해 나아가는 겸허한 수도의 행각이 아니고 무엇이랴? 위선은 선(善) 자체인 신을 죽이는 길이다. 고래로 인간은 신의 이름을 자기의 위선적 목적을 위하여 도용 내지는 도구화하는 습성에 젖어왔다.
브라「마니즘」의 사제들이 신을 그들의 도구화한 결과는 <고-타마>로 하여금 무신론적 경향을 취하게 하였고 19세기 말 「러시아」 정교회(正敎會)의 부패는 공산주의의 석권(席捲)을 준비하였다. 인간이 신을 그의 부속물 또는 장식물로 삼는 따위의 신앙은 타기하여야 할 「부르죠아」적 소유의 신앙인 것이다.
■ 믿음의 길은 독해 懺悔의 길이다
사람치고 자기의 죄를 뉘우칠 줄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은 다 하나의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대화로서 출발한 참회는 그것만으로서는 완전치 못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 까닭은 아무도 이 지상에서는 완전히 우리의 죄를 사해줄 수 있는 인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간들에게 아쉬운 것은 정말 구속의 주였던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구속의 주를 알고 「그」의 교회를 안 참종교인들에게 참회의 의의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가장 뚜렷한 것이 되었다. 참된 종교인들은 자기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는 사람들이래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정직한 사람들은 아버지이신 그 유일자(唯一者)에 대한 탕자의 슬픔을 안고 「그」 앞에 엎드릴 의무(Respensability)가 있는 것이다. 온전한 자유이신 신은 모든 인간들에게 자유의 길로 들어설 것을 바라고 있다. 그 자유의 길은 인간들이 뒤집어 쓰고 있는 죄의 때묻은 옷을 벗어제치고 인간들 사이에 사랑을 모셔오는 겸허무사(謙虛無私)한 생활을 통하여 열리는 것이다. 대승적무아행(大乘的無我行)은 바로 그런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놓여진 건늘 수 없는 심연이란 없다. 동서를 막론하고 우리 인간들 앞을 가로막는 심연이 있다면 그것은 절망과 자포자기일 따름이다.